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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럴 수밖에

단편소설 마지막회

by 김설원

지금 아버지와 나는 출발 선상에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한날한시에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게 됐다. 누군가가 고약한 심술을 부려 ‘결혼’과 ‘유기’라는 상반된 설정으로 엮어놓은 듯하다. 순간 의문이 생긴다. 과연 아버지는 결혼을 백년가약이라는 숭고한 의식으로 여기고 있을까. 아마 결혼생활에 싫증이 난다 싶으면 위자료를 적당히 쥐어주고 가뿐하게 돌아설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동안 몇 차례 여자를 사귀면서 부부 같은 애정을 뽐냈고, 그러다 헤어질 때면 상대가 섭섭하지 않게 금전으로 마음의 표시를 했다. 스스로를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아버지가 이번에는 어쩐 일로 결혼 턱시도를 입는지 모르겠으나 그 변덕이 오래가지는 않을 듯하다. 나는 아버지의 바람기를 후천적 지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전적이니만큼 그 바이러스는 미미하게나마 내 몸 안에 잠재해 있다가 다른 형태로 변형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목원을 떠올리며 이런 음모를 꾸민단 말인가.

지하철은 평소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 같다. 그때 시끌시끌한 공간에서 찬송가가 들려왔다. 승객들을 상대로 구걸하는 부부였다. 남편은 시각장애인이고, 아내는 다리를 절었다. 남편의 어깨에 낡은 카세트가 매달려 있었다. 부부가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어오자 승객들이 선심은 쓰지 않고 길만 터줬다. 빨간 소쿠리엔 동전만 초라하게 놓여 있었다. 연두와 악연을 맺기 전만 해도 나는 동냥아치를 보면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노인들이 내미는 볼펜이며 껌도 주저 없이 사줬다. 나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소쿠리에 넣는 대신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이들은 사실 신체가 멀쩡한데 불구인 척하며 부부 행세를 하는 동업자일 수도 있다. 동냥 연극이 끝난 후 자기들의 아지트로 숨어들어서는 수입이 좋네 나쁘네 떠들어대겠지. 자원봉사자들의 발자취와 불우한 이웃들을 소개한 ‘나눔’이란 책자 역시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민들레라는 익명의 독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나눔’이야말로 좋은 목적과 나쁜 수단을 제멋대로 구사한 돈벌이용 홍보물일지도 모른다.

세 정거장만 더 가면 수목원에 도착한다. 아까부터 연두가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면서 배가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수목원에 다 왔으니까 좀 참으라고 했더니 울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지하철의 문이 열리자 연두가 공처럼 튀어나갔다.

“그러게 누가 사람들이 주는 대로 받아먹으래? 저 표시를 봐. 이 층계를 올라가면 화장실이 있다는 뜻이야. 복잡하지 않으니까 혼자 다녀올 수 있지?”

연두가 배를 움켜쥐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 지하철역은 내리고 타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한산하다. 나는 통나무 의자에 주저앉았다. 지금부터 시작이건만 고된 여정을 가까스로 마친 것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속이고 비위 맞추는 악습을 요령껏 떠받들면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을 듯싶다. 레인보우, 언니, 덩치, 아버지의 눈엔 단단한 밥줄을 잡겠다고 허구한 날 고시촌에 처박혀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한심스러워 보였을까.

주변이 금세 수선스러워졌다. 수목원이 지척이라 그런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캐스터네츠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떤 아이가 제 엄마 무릎에 앉아 입으로 내는 소리였다. 나는 연두의 배낭을 열어 캐스터네츠를 꺼냈다. 나들이가 생전 처음일지도 모를 연두는 이깟 캐스터네츠를 까맣게 잊고 있겠지. 어미 뱀이 지 새끼 다 죽였다고 해코지하면 어쩌느냐는 염려를 넌지시 흘린 레인보우의 이메일이 불현듯 떠오른다. 교활한 인간, 그것도 이런 날을 대비해서 나를 겁주려고 꾸며낸 이야기였을 거야. 내 새끼를 버리면 앞으로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해코지 당한다…… 나는 캐스터네츠의 낡은 고무줄을 송곳니로 끊어버렸다.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수목원을 찾는 부모들이라면 숲속에서 우왕좌왕 헤매는 연두를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이다. 연두가 아무리 똘똘해도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찾아간 수목원에서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밀집해 있는 우리 동네로 돌아올 수는 없겠지. 저절로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이 쾌재인지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모, 수목원에 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어느새 화장실을 갖다온 연두가 말짱한 얼굴로 물었다. 때마침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지하철이 가쁜 숨을 몰아쉬듯 하며 멈추자 흥에 겨운 아이들이 잽싸게 탔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몸이 달은 연두가 빨리 지하철을 타자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자리가 없잖아. 금방 또 오니까 앉아서 기다려.”

지하철이 떠났다. 승강장의 CCTV엔 연두와 내 모습만 붙박여 있을 것이다. 오래된 기왓장 같은 흑백 모니터를 보며 나는 한여름인데도 추위를 느꼈다. 우리는 조금 떨어져 앉았다. 내가 다리를 꼬니까 연두도 따라했다. 누구든 연두와 나를 보면 가족이라고 생각하겠지.

“이모, 집에 간장이 떨어졌다고 했잖아요. 이따 들어갈 때 사가지고 가요.”

“연두야, 내 이름은 인사이드아웃이야.”

두 대의 지하철이 지나갔다. 그때마다 나는 수목원으로 가는 지하철이 아니라고 연두에게 거짓말을 했다. 기왕이면 연두가 인정이 많은 ‘민들레 귀하’에게 갔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본다. 녹음이 짙은 수목원에 연두를 풀어놓은 후 눈치껏 길을 살피는 내 행방을 그려보는데, 푸른색 띠로 몸체를 두른 지하철이 기적을 울리며 들어왔다. 연두가 튕기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 몸은 벤치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아릿한 시선만 지하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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