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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럴 수밖에

단편소설 5화

by 김설원

이번 정차역은 고속터미널이다. 내 몸이 지하철 밖으로 밀려 나간다. 한목에 쏟아져 내리는 승객들의 물리적 관성에 의해서다. 나는 인파 속에 파묻혀 출구를 향해 슬그머니 발걸음을 뗐다. 어떤 아이가 목 놓아 울지만 연두의 음성은 아니었다. 연두는 나를 뒤따라 내리지 못하고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발끝에 힘을 줬다.

“거, 왜, 자꾸 밀고 그래요.”

앞서 걷는 사내의 타박이 정수리에 꽂혔다.

에스컬레이터 앞까지 왔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 층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순간 누군가가 내 남방 자락을 확 움켜쥐었다. 어떤 노인이나 임산부가 나의 몸에 의지해 층계를 오르려는 것이리라. 나는 뿌리치듯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때 또 다른 손이 오른쪽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두가 헤벌쭉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수목원이에요? 야, 분수다!”

‘고속버스터미널’이라고 쓰여 있는 안내 표지를 따라가자 구름장 같은 물줄기가 냉기를 선사한다. 가슴이 확 트였다. 호화로운 분수와 대형서점, 각종 편의시설, 익살스러운 인체 조형물이 조화롭게 어울려 있는 이곳은 연두를 홀리기에 족하다. 백화점과도 연결되어 있다. 오솔길처럼 생긴 에스컬레이터에는 서울을 들고 나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내 목소리를 삼킬 만큼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연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주위를 둘레둘레 살펴본다. 나는 분수대를 울타리처럼 둘러싼 대리석 공간에 앉았다. 작은 폭포 아래 앉아 있는 기분이다. 심줄이 불거진 손등 위로 가랑비처럼 떨어지는 물방울이 몽롱한 정신을 깨운다. 연두는 색색의 개구리가 그려진 배낭을 둘러멘 채 분수대 주변을 뛰어다니다가, ‘책 읽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구릿빛 동상의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낄낄거렸다. 정신이 팔린 건지, 아니면 못들은 척하는 건지 내가 거듭 불러도 연두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분수대는 하얀 물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있었다.

“애비가 부산에서 땅 장사를 한다더라. 임자 없는 땅이 널렸다드만.”

할머니가 적어준 부산의 어느 아파트 주소를 들고 언니와 함께 길을 나선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두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지만 쥐꼬리만 한 생활비를 띄엄띄엄 가져다주기는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가 저승으로 떠난 뒤부터 아버지의 우중충한 삶에 조금씩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부부가 궁합이 안 맞으면 지지리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뜨는겨. 봐라, 니 엄마 죽고서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지 않냐?”

며느리를 잃고 나서부터 할머니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셨다. 한 철은 서울, 한 철은 부산에 기반을 두고 아버지는 ‘사업상’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녔다. 그해 여름, 서울역 대합실에서 언니와 나는 부산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방학 때라 기차역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내 옆자리에 앉은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옥수수를 떼어 먹이고 있었다. 내가 입맛을 다시며 눈을 떼지 못하니까 그 아주머니가 옥수수 반쪽을 내 손에 쥐어줬다. 그 순간 언니가 내 팔을 낚아채더니 화장실로 끌고 가서 왜 거지새끼처럼 구느냐며 등짝을 때렸다. 예나 지금이나 언니는 남에게 동정 받는 걸 질색했다. 우리 자매는 뒤늦게 돈복이 터진 아버지 덕분에 무난히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돈맛을 알면 인색해진다던데 아버지는 오히려 씀씀이가 헤퍼졌다. 급기야 여색에 빠진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과자를 얻어먹는 연두를 응시하다가 한 자락의 추억을 떠올렸지만 나는 언니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아무하고나 살갑게 어울리는 연두를 보면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연두가 저렇게 협조적이라면 나는 오늘 스스로에게 부여한 임무를 수월하게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제 팔자대로 산다는 살아생전 할머니의 장담만큼 지금 나에게 위안을 주는 말은 없다.

그날 패스트푸드점에서 레인보우와 헤어진 후 나는 그녀의 큰아들 연두를 성심껏 보살폈다. 레인보우가 책값을 입에 올리며 사례비 명목으로 오십 만원을 줬으니 그에 걸맞게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집을 청소하고, 연두의 입맛에 맞게 요리도 했다. 피시방에 가서 함께 게임을 하거나 어린이 도서관에도 데리고 갔다. 연두는 나의 깍듯한 수발을 받으며 마냥 행복해 했다. 제 엄마를 까맣게 잊고 지낼 정도로. 연두가 잠든 동안만 나는 수험서적을 들춰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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