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3화
‘덩치’ 때문에 의기소침해져 있던 내가 메일 박스를 열어본 건 통장 잔액을 확인한 후였다. ‘받은 편지함’에는 모두 열 두 통의 편지가 있었다. 상품 광고 일색인 스팸메일을 삭제하는데 ‘당신의 서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라는 제목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 안녕하세요, inside out씨. 온라인 서점에서 당신의 서평을 읽었어요. 명쾌한 서평에 마음이 끌려 바로 그 책을 구입했답니다. 저는 여섯 살배기 아들과 갓 백일이 지난 딸의 엄마예요.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잠시 일을 쉬고 있어요. 아이들한테 꼼짝없이 붙들려 있으니 여행은 고사하고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없답니다. 요즘은 포털사이트의 각종 설문조사에 참여하고 네티즌들과 정보를 나누면서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 있어요. 이런 편지를 띄우긴 생전 처음이네요. 그만큼 inside out씨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는 거겠죠? 당신에게 종종 메일을 보내도 될까요?
다정한 말을 가장한 홍보 메일이 아닐까 싶어 나는 읽고, 또 읽었다. 내 눈에는 진솔한 편지였다. 이메일에서 눈을 떼자 마음 한 곳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메일을 보낸 여자는 ‘rainbow’였다. 나는 단골로 드나드는 온라인서점의 ‘마이리뷰’에 간간이 글을 올렸다. 그곳에서는 매월 세 편씩 우수 서평을 선정해 쿠폰을 선물로 줬다. 지난 달에 우수작으로 뽑힌 내 독후감을 그녀가 읽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관심이 덩치에게 받은 모욕을 씻어주는 듯했다. 나는 레인보우에게 답장을 썼다.
나는 일상의 안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이런 노력을 시도했다는 자체가 내겐 큰 변화였다. 물론 그 계기는 레인보우가 만들어줬다. 나는 레인보우와 이메일 편지를 주고받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왠지 내게만 불친절한 것 같은 세상과 호흡을 맞추려면 두루뭉술하게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도 해열제 역할을 했다. 나는 툴툴 털고 수험생 신분으로 돌아갔다. 날마다 도서관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뒤틀린 일상이 점점 바로잡혀졌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험생의 처지여서 나는 레인보우에게 꼬박꼬박 답장하지 못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반인륜적인 사건이나, 한없이 탐욕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레인보우는 심지가 굳은 여자 같았다.
― 혜리엄마라고, 우리 앞집에 세 들어 사는 여잔데 자식이 네 명이야. 가끔 혜리엄마를 보면서 자식 욕심이 많은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피임을 해도 임신이 잘 되는 여자들이 있는데 혜리엄마가 그런 부류였어. 인근 대학의 학생식당에서 일하면서 아이들한테 정성을 쏟아.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은가봐. 피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여자가 한심스럽다가도, 일에 치여 살면서 아이들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해져.
레인보우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은 물론이고 이웃들의 집안 사정을 재미나게 써서 보냈다. 인터넷 통신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관계가 대개 물거품 같아서 나는 레인보우와의 인연도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레인보우가 들려주는 다채로운 이야기는 맛깔스럽고 인간미가 느껴졌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빠져든 아이처럼 나는 이제나 저제나 그녀의 이메일을 기다렸다.
― 날이 푹푹 찌는데 밥은 제때 챙겨 먹고 있어?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란 걸 잊지 마. 오늘은 뱀 이야기를 들려줄게. 인천에 사는 내 친구가 개업 식당에서 제 키만 한 화분을 얻어다가 베란다에 놔뒀대. 그런데 어느 날 실지렁이 한 마리가 거실에서 기어 다니더라는 거야. 버렸겠지. 근데 하루가 지나니까 또 나타나더래. 버리면 생기고 또 생기고…… 하도 이상해서 그게 어디서 왔나 하고 집 안을 살피는데 베란다 화분에서 실지렁이가 꼬물꼬물 기어 나오더라는 거야. 친구가 모종삽으로 화분의 흙를 파 봤더니, 아, 글쎄, 그 안에 뱀알 껍데기가 수북하더래. 알에서 부화한 뱀의 새끼가 그 실지렁이였던 거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내 친구는 오죽했겠어. 화분을 버리기 전에 언뜻 보니까 테두리에 조기비늘 같은 게 다닥다닥 붙어있더래. 그게 어미 뱀이 기어 들어갔다 나온 흔적 아니겠어? 그 화분이 농원에 있을 때 뱀이 거기다 알을 깐 모양이야. 내 친군 당장이라도 집을 팔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래. 뱀의 새끼가 집 안 구석구석 숨어 있다고 생각하면 나라도 팔아버리고 싶을 거야. 내가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 어미 뱀이 지 새끼 다 죽였다고 내 친구한테 해코지하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