밋밋한 일상에 된바람이 불어 닥친 건 장맛비가 쏟아지던 초복 때였다. 웬일로 사장이 직원들에게 선심을 베푼 삼계탕을 먹고서 사무실로 들어가자 키가 작달막한 ‘덩치’가 내게 시비를 걸었다. 경매 서류를 앞에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다툼을 하는데 어느 순간 덩치가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대번 열이 뻗친 내가 “이 무식한 건달새끼야, 네가 뭔데 나를 때려,” 하고 앙팡지게 대드니까 이번에는 얼굴을 때렸다. 그날 밤, 덩치의 무성의한 사과 전화를 받긴 했으나 나는 그 일을 흐리멍덩하게 넘기지 않겠다며 독기를 품었다. 물론 사채 사무실의 알바 자리는 당장 내놓았다.
그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나는 전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덩치의 면면을 알아보려는 마음에서였다. 내가 억울한 사연을 털어놓자 전임자도 그 인간한테 당한 적이 있다며 흥분했다.
“고소할 거야.”
“그 인간 폭행 전과도 있어요. 알고 지내는 경찰도 많대요.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그런 작자를 어떻게 그냥 놔둬?”
“건달 부스러기들도 경찰 인맥 운운하며 활보하는 세상인데 그런 끄나풀 하나 없는 우리가 참아야죠, 뭐.”
시간이 갈수록 나는 방향을 못 잡고 갈팡질팡했다. 예전에 덩치가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어떤 경리에게 고소를 당했는데 경범죄에 적용되어 겨우 십 만원인가 이십 만원의 벌금을 납부하고 끝냈다는 전임자의 부언도 귓가에 맴돌았다. 무엇보다 경찰서에 앉아 조사를 받는 정경을 떠올리자 피해자 입장이면서도 지레 주눅이 들었다. 답답했다. 결국 나는 경찰서 앞에 얼씬도 못한 채 애써 분을 삭였다. 모계사회의 도래를 운운할 정도로 여자들의 입심이 막강해진 오늘날, 일터에서 맞고도 잔머리나 굴리고 있는 내 꼴이 한심스럽다 못해 딱했다.
딱딱 딱딱딱. 캐스터네츠의 불규칙한 박자가 머릿속을 사정없이 쪼아댄다. 연두가 한쪽 팔을 휘적거리며 캐스터네츠를 치고 있었다. 입으로는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린다. 연두는 처음 만날 때부터 캐스터네츠를 움켜쥐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타악기를 시도 때도 없이 쳐댔는데 어느 날은 그것을 잃어버렸다며 동네가 떠나갈 듯 울어댔다. 캐스터네츠는 옷장 사이에 처박혀 있었다. 내가 가져다준 먹거리를 말끔히 먹어치운 연두의 배가 퉁퉁하다. 나의 거룩한 봉사는 오늘로 끝이니 연민의 정이라면 몰라도 저 징그러운 식탐을 흰 눈으로 볼 것까지야 없겠지.
휴대전화에서 벨소리로 지정해둔 노래가 흘러나왔다. 연두가 휙 고개를 돌린다. 시련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여가수가 ‘그땐 바보처럼 몰랐어’ 라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열창한다.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터치하자 왜 그렇게 전화를 늦게 받느냐며 언니가 대뜸 성을 냈다. 다혈질인데다 산후우울증까지 겹쳐서 폭발 직전이었다.
“너는 몇 시에 출발 할 거야.”
아버지의 결혼식을 두고 하는 소리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언니는 결혼식 잔치에 가려는 모양이다. 언니는 아버지의 성품이나 행동거지를 부끄러워하지만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킨다. 아버지의 재산을 염두에 둔 꿍꿍이셈일 것이다. 아버지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면서 얻어 쓰는 목돈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언니의 이중인격을 고깝게 보고 싶진 않다. 나의 주제넘은 충고를 새겨들을 언니도 아닐뿐더러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까.
“하필이면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날짜를 잡을 게 뭐야. 아버지가 결혼식에 돈을 왕창 처발랐더라. 그 주책을 누가 말려. 지금이 두 시 이십 분이니까 넉넉히 세 시쯤 나가면 되겠네. 이따 보자. 참, 김치 담가 놨으니까 가져다 먹어.”
“벌써 두 시가 지났어?”
날쌔게 지나간 시간 앞에서 얼떨떨해진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온다. 주방이며 다용도실을 기웃거리는 연두의 느려터진 몸짓이 초조함을 부추긴다. 우리 집에서 열흘 가까이 머문 연두는 이 원룸의 내부를 훤히 알고 있었다. 내가 두통에 쩔쩔매고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붙박이장에서 구급상자를 가져올 정도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두의 남다른 눈썰미를 칭찬하며 엉덩짝을 두들겨줬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게 다 빌붙기 위한 속셈인 듯해서 소름이 끼친다. 나는 미리 위치를 알아둔 수목원을 떠올리며 나갈 준비를 했다. 이제 운동화를 신기만 하면 되는데 어디 일거리가 없나 하고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청첩장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화장대를 정리하고, 화초에 물을 줬다. 노트북 모니터의 손자국을 물티슈로 지우다가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