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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럴 수밖에

단편소설 1화

by 김설원

아버지가 빠른우편으로 보낸 당신의 청첩장은 온통 화사하다. 신랑신부 이름과 예식장 약도는 황금색으로 도드라지게 인쇄했다. 아버지가 또 턱시도를 입든 아홉 살이나 어린 이혼녀를 배필로 삼든 나는 관심 없다. 그저 아버지의 인생만큼이나 요란한 청첩장의 제작비용이 궁금할뿐이다.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웨딩아테네 비엔나홀, 결혼식은 오늘이다.

“야, 누가 네 마음대로 참외를 꺼내 먹으라고 했어.”

나의 갑작스런 고함에 놀란 연두가 느릿느릿 걸어온다. 어느 결에 냉장고를 뒤졌는지 연두의 손에는 벌써 반이나 먹은 참외가 들려 있었다. 입안이 미어터지도록 참외를 껍질째 씹어 먹는 연두의 탐욕스러운 눈빛은 가히 동물적이다. 나는 손에 적당히 힘을 주어 골칫거리를 떠밀었다. 연두가 넘어질듯 말듯 휘청거린다.

“이모, 우리 수목원에는 언제 가요?”

연두는 노여움도 타지 않고 손등에 묻은 참외씨를 떼어먹으며 깝죽거렸다. 마냥 우습게 본 상대한테 한방 먹은 기분이다. 나는 어쩌자고 금세 마음이 돌변해서 “연두야, 만두 쪄줄까? 아니면 아이스크림 먹을래?” 라고 말하며 자상하게 굴었다. 연두가 두 팔을 흔들면서 갈매기처럼 끼루룩거린다. ‘너는 붙임성 좋아서 어딜가든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 기가 살아서 나대는 연두를 보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요즘 ‘inside out’이라는 내 아이디가 악운을 몰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아이디를 바꾼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올봄에 치른 9급 공무원시험의 영어 과목에서 관용어를 찾는 문제가 출제됐다. 두 개의 답을 놓고 끙끙대다 고른 게 그만 오답이었다. 나는 공무원시험에서 또 미끄러졌다. 마치 그 문제 때문에 떨어진 듯 억울해 하다가 나는 무슨 억하심정이었는지 그 영어 문제의 정답인 ‘inside out’으로 아이디까지 바꿔버렸다. 그런데 아이디를 변경한 후부터 제법 반듯하던 내 일상이 삐틀어지기 시작했다. ‘뒤집다, 샅샅이 뒤지다’ 라는 그 관용어의 뜻대로 내 생활 형편이 익명의 다수에게 속속들이 드러난 것 같았다.

입추가 가까워오건만 뙤약볕은 여전하고 어째 매미 울음소리도 점점 요란해진다. 어지럽게 쏴 하니 울다가 어느 순간 뚝 그치는 매미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도의 전류가 내 몸을 파고드는 것 같아 저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전자레인지에 데운 냉동만두를 접시에 담았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과 요구르트도 꺼냈다. 마치 먼 길 떠나는 자식을 안쓰러워하는 엄마처럼 연두에게 뭘 못 먹여서 안달하는 내 심리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 이메일 주소로 뜬금없이 날아온 전자우편의 내막을 꺼내놓기에 앞서 그 무렵 벌어진 사건부터 뒤적여보는 게 순서겠다. 한 통의 전자우편에 마음을 빼앗긴 건 인간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으니까.

지인들이 입맛을 다시는 공무원직에 나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적성, 성격과 동떨어진 생업이어서였다. 나라에서 책임지는 ‘생계보장’이라는 그 신원명세서가 결국 일신을 태만하게 변질시키고, 속된 낙천주의자로 만들어버린다며 나는 대학 동기들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두 번째 이직을 하면서부터 나의 꼿꼿한 주관이 느슨해졌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책임을 다했으나 매번 부당한 처우가 의욕을 꺾어 놨다. 집단의 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한통속이었다. 그런 직장을 전전하다보니 내 앞날이 불안해졌다. ‘지금 적성을 따져가며 일할 때가 아니야, 어서 안전한 밥그릇을 챙겨 놔야겠어’ 라는 판단이 섰을 때 내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아버지가 일찌감치 결혼자금 명목으로 마련해준 전세 원룸이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축한 돈이 내 마음을 살살 흔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했지. 내 마음이라는 쇠가 뜨겁게 달궈졌을 때 모양을 잡아야 한다, 식기 전에 빨리! 나는 주저 없이 사표를 냈고, 9급 공무원시험 준비생의 길로 유턴 했다.

그 후 매번 근소한 점수 차이로 합격하지 못한 나의 심신은 상처투성이였다. 통장이 빈약해지는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어질어질했다. 세 번째 불합격 통보를 받고 나서 일단 아르바이트 자리부터 알아봤다. 나는 사채 사무실에 이력서를 냈다. 오후 두시 이후부터는 눈치껏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전임자의 귀띔에 솔깃했다. 그곳에서 밥벌이를 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너절한 말투와 상스러운 행동을 일삼았다. 나는 어디선가 썩은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사채’ 사무실이 아니라 그 남자들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당신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듯 찻잔이며 화장지를 따로 쓰고, 가급적 말을 섞지 않으면서 뻣뻣하게 사무실을 오갔다. 따지고 보면 사채 사무실에서 어슬렁거리다 시간이 되면 일수 도장을 찍으러 다니는 그들이나, 허구한 날 수험서적과 씨름하는 나나 앞날이 불투명한 인생이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유치한 우월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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