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레인보우의 질박한 문장에 끌렸다. 글을 눈여겨보면 글쓴이의 마음이 웬만큼 드러나게 마련이었고, 나는 그것을 잣대로 레인보우를 관찰했다. 만족스러운 글벗이었다. 레인보우의 이메일은 일주일에 두 번 꼴로 날아왔다. 그것은 삭막한 동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수험생의 머릿속에 이따금 무지개로 새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인보우는 좀 다급한 문장으로 큰아이를 잠시 봐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써서 보냈다. 의류업체에 근무하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두 아이를 데리고 병간호를 하려니 너무 힘겹다는 거였다. 친정이며 시댁 식구들이 해외나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서 맡길 곳이 없다고 했다. 집에 상주하며 아이를 보살펴 주는 도우미를 구해볼까 했지만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내게 아이를 맡기려는 걸 보니 레인보우도 나처럼 새로 사귄 말벗의 됨됨이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친정엄마가 시골에서 바쁜 농사일을 대충 갈무리 해놓고 올라온다니까 넉넉잡아 사흘이면 된다고 했다. 반드시 사례를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레인보우의 간청을 거둬들인 건 아버지의 청첩장과 함께 배달된 우편물 때문이었다. 그것은 19페이지 분량의 ‘나눔’이라는 작은 잡지였다. ‘나눔’의 표지모델은 초등학생이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여자아이가 책을 읽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책상 위에 엎드린 자세로 누군가를 바라봤다. 둘 다 천진난만했다. 맞벌이 부부를 위한 탁아시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개발도상국 어린이들, 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인도네시아 어느 마을의 생존 환경과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체험담이 눈길을 끌었다. 잡지 사이사이에 끼워놓은 엽서에는 ‘하루 100원 모으기’ ‘작은 실천이 큰 희망이 됩니다’라는 캠페인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후원자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엽서였다.
나는 우편함에 기대 서서 잡지를 단숨에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눈을 뗐을 때,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인정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작은 실천이 모이면 건전한 기부문화가 널리 퍼지리라는 생각도 불쑥 싹을 틔웠다.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러다 ‘나를 어떻게 알고 이런 우편물을 보냈지?’ 라는 의구심이 들어 우편봉투를 훑어봤다. 받는 사람 자리에 ‘민들레 귀하’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살짝 입맛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주소로 봐선 내 우편물이 분명했다. 설마 전에 살던 세입자의 이름이 민들레는 아니겠지, 하고 생각해 보니 나보다 앞서 머물다 간 사람은 김민호란 남자였다. 한 달 남짓 이쪽으로 배달된 채무 관련 우편물 때문에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회복지 단체가 어떤 경로를 통해 원룸이며 아파트의 주소를 알아냈는데, 거주자의 이름을 모르니까 받는 사람을 ‘민들레’로 통일한 것 같았다. 민들레 씨는 깃털이 있어 멀리 멀리 날아가므로 무엇보다 ‘사랑’을 앞세우는 사회복지 단체의 상징적인 꽃으로 제격이었다.
나는 사회복지 단체의 행태가 좀 씁쓰름했다. 물론 ‘민들레’ 때문이었다. 너도나도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민들레라고 싸잡아 우편물을 보내다니…… 사회복지 단체의 직원들이 한데 모여 앉아 어느 지역, 어느 집의 ‘민들레’가 걸려드는지 두고 보자면서 펜을 굴리는 모습도 아른거렸다. 무시당한 이름이 거슬리긴 했어도, ‘나눔’에 공감한 내 마음이 이내 돌아서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레인보우의 큰아이를 그러안기로 했다. 순전히 봉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났다. 서울의 한낮 최고 기온이 34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레인보우가 먼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짙은 포도주색 선글라스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왔다. 남편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들락거리다가 눈병이 옮았다고 했다. 이메일 서신을 많이 주고받았는데도 막상 실물을 보니까 서먹서먹했다. 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자주 침을 삼켰다. 그녀가 정겹게 구사하는 인사이드아웃이며 레인보우라는 아이디도 스테인리스 같은 느낌이었다. 레인보우의 큰아이는 햄버거 세트를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레인보우는 사이버 공간에서보다 더 다정하고 유머러스했다. 무슨 다급한 용무가 있는지 자꾸 손목시계를 쳐다봐서 나까지 덩달아 조급해졌다.
“보험회사 직원과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겠어. 조만간 다시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 나눠. 이거 얼마 안 되는데 책값에 보탰으면 좋겠어. 내 진심이니까 사양은 금물! 아휴, 이 녀석아 천천히 먹어. 그러다 배탈 나겠다. 엄마가 바로 데리러 갈 테니까 이모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한다?”
레인보우는 제 아이의 양쪽 볼에 뽀뽀를 하고는 서둘러 나갔다. 아이는 제 엄마가 가든 말든 콜라나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중요한 물건을 건네받지 않았거나, 뭔가 주는 걸 깜빡 잊은 것처럼 왠지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다. 얼른 쫓아나가 레인보우를 불러 세워 무슨 말인가를 좀 더 해야겠는데 몸이 자꾸만 까부라졌다. 에어컨 바람으로 실내는 시원했지만 내 심신은 더위에 부대꼈다. 나는 레인보우의 큰아이를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봉사자로서 내딛는 첫 걸음이 이상하게 가볍지 않았다. 레인보우가 건네준 봉투에는 현금 오십 만원이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