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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럴 수밖에

단편소설 6화

by 김설원

그런데 이틀인가 지나서부터 레인보우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내 원룸에 연두를 데리고 들어간 날 저녁 무렵 레인보우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 뒤로 소식이 뜸했다. 연두가 우리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소상히 적어 이메일을 보낸 후 확인해 보면 ‘읽지 않음’이라고 파랗게 떠 있었다. 문자메시지를 남겨도 잠잠했다. 만약 나라면 상대방이 귀찮을 정도로 연락해서 연두의 안부를 물었을 텐데…… 친정엄마는 아무래도 농사일이 바빠서 상경하지 않았나……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남편의 상태가 악화됐으면 병간호를 하느라 경황이 없겠지…… 마음을 다독이며 일주일을 보냈다.

하지만 나의 이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연두는 영특하니까 병원의 위치나 어쩌면 외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지도 몰랐다.

“난 아빠가 없는데요?”

“요게 오냐오냐 하니까 툭하면 이모한테 장난을 치려고 해.”

나는 이메일을 열어 레인보우가 보내준 첨부파일을 클릭했다. 저번에 보내준, 연두 아빠의 품에서 손가락을 빨거나 까르르 웃는 아기 사진이었다.

“자, 봐. 네 아빠랑 동생이잖아.”

연두가 신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쳐다보더니, 나한테 무슨 아빠랑 동생이 있느냐고, 이모는 바보라며 허공에 대고 어퍼컷을 날렸다. 입으로 따발총 소리를 내면서 방안을 빙빙 돌기도 했다. 그러더니 “라면 끓여줘, 라면 끓여줘” 하면서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나를 어려워하기는커녕 그새 친해졌다고 서슴없이 반말지거리를 하는 어린애한테 놀림감이 된 기분이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나는 연두를 붙잡아 세게 꿇어 앉혔다. 연두가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알고 보니 그동안 레인보우가 내게 흘린 말들은 죄다 거짓이었다. 내가 방바닥을 탁탁 치면서 다그쳐 물으니까 “엄마랑 어떤 아저씨랑 옥상에서 살았어요”, 하면서 연두가 처음으로 어린아이답게 울먹이며 말했다. 옥상? 아, 옥탑방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머리를 굴릴 줄도, 꾸며서 말할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 덕분에 레인보우의 너저분한 행실이 밝혀졌다. 말문이 막힌 채 헛웃음만 나왔다. 이메일의 보관함에 고이 저장해 둔 글들이 환심을 사기 위한 미끼였고, 결국 가면이었다는 사실에 숨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연두야, 가자!”

나는 연두를 소리쳐 불렀다. 장난감 가게를 기웃거리던 연두가 재깍 달려왔다.

“이모, 벌써 집에 가요?”

“수목원에 가기로 했잖아.”

“여기가 수목원 아니에요?”

“나무가 많은 곳이 수목원이야.”

“와!”

이곳이 수목원이든 아니든 어디를 또 간다고 하니까 신이 나는지 연두가 폴짝폴짝 뛰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철역은 고속터미널 이용객들로 붐볐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연두가 조용히, 착한 아이처럼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집착으로 느껴지는 연두의 태도가 소름끼쳐서 얼른 거리를 두고 싶은데, 아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끈끈한 힘이 내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동안 이 애물단지를 감쪽같이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모로 궁리해 봤다. 레인보우가 독심을 품었지만 그래도 ‘엄마’니까 뒤늦게라도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보호기간을 좀 더 연장하자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 이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계획적인 범행임이 밝혀졌는데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나는 연두를 누군가에게 넘기면서 레인보우처럼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레인보우가, 아니 세상이 내게 가한 횡포에 양심을 지켜가며 응수하기 싫었고, 어떤 경우든 상대방이 하는 대로 똑같이 대응해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덩치에게 손찌검을 당했을 때도 경찰서에 고소하겠다고 벼르기 전에 그 작자의 귀싸대기를 갈겼어야 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모정마저 팔아먹은 그 악질의 깔밋한 행위를 눈 딱 감고 실습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연두는 버려질 아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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