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화
옆방의 동정을 살피고 싶은데 그러는 순간 시아버지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칠 것만 같다. 난이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앉아 발꿈치를 만지작거린다. 그때 시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면서 욕실로 들어간다. 전화벨 소리에 감각이 살아나면서부터 이쪽의 밀담을 훔쳐들은 게 틀림없다. 시아버지가 ‘피피’라는 암호의 속뜻까지 알고 있는 듯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힘겨운 신음이 욕실에서 원망처럼 터져 나온다. 난이가 슬쩍 방문을 연다.
“변비가 점점 심해서 큰일이네요.”
난이가 짐짓 태연하게 말하며 시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벌써 사흘째 변을 못 봤다. 복숭아씨 가루가 변비에 좋다던데, 넌 어째 입으로만 걱정을 하냐. 얘, 나도 복숭아씨 가루 좀 해다우. 동요를 부르고 기공체조를 하면 뭐해, 똥구멍이 꽉 막혀버렸는 걸…….”
변기 속에서 와글거리는 물소리가 시아버지의 푸념을 삼켜버린다. 난이는 주방 겸 거실로 나가 식탁 위에 펼쳐놓은 스포츠신문과 유니폼을 치운다.
“뭐하느라고 여태 주방에 불을 켜놓고 있냐. 불빛 때문에 당최 잠을 못 자겠다.”
난이는 얼른 불을 끈다. 오히려 희미하게라도 불을 켜놓지 않으면 잠을 설치면서 애먼 불빛에 화풀이를 해댄다. 시아버지가 허리춤에 손을 넣으며 어기죽어기죽 걸어간다. 몸에 꼭 맞는 사이즈를 샀는데도 내복이 헐렁헐렁하다.
유니폼의 윗도리가 피곤에 치진 사람처럼 침대 끝자락에 걸쳐 있다. 단추 하나가 떨어졌을 뿐인데 유니폼이 초라해 보인다. 난이는 옷장 문을 열고서 가을 외투 안감에 붙어 있는 단추를 잡아뗀다. 짝짝이 단추라도 이가 빠진 듯한 휑한 자리에 달아놔야만 잠이 들 것 같다. 아내로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진다. 난이는 바늘집에서 고등어 가시처럼 생긴 바늘을 꺼내 실을 꿴다.
시아버지가 갈라진 목소리로 동요를 부른다. ‘산토끼’나 ‘퐁당퐁당’ 따위의 경쾌한 동요들이 무슨 장송곡처럼 울려 퍼진다. 몹쓸 전화가 단잠을 깨워 짜증이 난다는 듯 시아버지가 목청을 돋운다. 유니폼에 쥐색 단추가 달렸다. 단춧구멍이 작다. 도톰한 단추가 살짝 벌어진 구멍으로 빡빡하게 들어간다. 시아버지가 동요를 부르다 말고 지팡이로 벽을 두드린다. 난이는 얼른 옆방으로 간다. 시아버지는 동요 공책을 우묵한 배 위에 올려놓고 천장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
“반달을 어떻게 부르지?”
“반달요? 음…… 푸른 하늘 으은하수 하얀 쪽배에…….”
시아버지가 더듬더듬 다음 소절을 잇는다. 난이는 들릴 듯 말 듯 동요를 따라 부르다가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 가려고?”
“우유 사가지고 올 게요.”
도옷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가안다 서어쪽 나라로…… 고저도 장단도 맞지 않는 노랫소리가 처량하게 문지방을 넘는다. 난이는 쪽배처럼 생긴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나도 서쪽 나라로 가고 싶어’ 라고 중얼거린다.
아파트 주차장이 승용차들로 빼곡하다. 이 주공아파트는 지하 주차장이 없어서 항상 복잡하고 붐빈다. 무슨 중고자동차 매매단지 같다. 난이는 일층 난간에 서서 고개를 빼고 가로수를 바라본다. 남편이 자주 차를 세우던 공간에 몸집이 큰 지프가 들어앉아 있다. 난이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곧장 정문으로 나간다.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날마다 조금씩 시간을 저축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전세금이 좀 부족해서 일층에 살림집을 얻었는데, 가장 낮은 곳에서 살다보니까 하루가 25시간처럼 여겨졌다. 예전에는 심리적으로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알차게 쓰려고 몸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인근 여성문화원에서 저렴한 수강료로 ‘역사문화교실’과 ‘생활일본어’ 강좌를 듣고, 짬짬이 뜨개질을 했다. 하지만 부부찻잔과 부부수저와 부부베개를 혼자 쓰고 있는 지금, 난이는 그 풍성한 시간 속에서 고약한 허기를 느낀다.
난이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공용주차장 앞에서 이쪽저쪽을 쳐다본다. 어린 시절 난이는 밤마다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이모를 기다렸다. 뺑소니 차에 치여 비명횡사한 언니 부부의 핏줄을 거둬 키우느라고 이모는 혼기를 놓쳤다. 개인병원의 간호사였던 이모의 청춘이 시들어 떨어졌다. 이모는 ‘보름달’ 빵을 즐겨 먹었다. 한밤중에 해쓱한 얼굴로 귀가하는 이모가 안쓰러워 보여서 어린 난이는 그 빵을 자주 샀다. 이제나저제나 이모가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조금씩 떼어먹다 보면 보름달 빵은 어느새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