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3화
난이는 가로수를 따라 걷다가 다시 아파트 정문으로 되돌아온다. 인적이 뜸한 깊은 밤이다. 대한(大寒)이 지나니까 바람이 한결 부드럽다. 텔레비전에서 새해를 알리는 타종 소리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월의 끄트머리다. 3월에는 시아버지의 생신 상을 차려드리고, 5월이 오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어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폭염에 들볶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추석이 코앞이고, 하필이면 한겨울에 숨을 거둔 남편을 납골당에서 만나고 나면 세상은 크리스마스다 세밑이다 하며 술렁거렸다. 달력 안에 빼곡한,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날들이 야속하게 술술 빠져나갔다. 난이는 아파트 놀이터의 벤치에 앉는다. 오늘 초저녁부터 마음이 어수선한 까닭은 남편의 유니폼 때문일 것이다. 경모의 전화를 받으면서 쩔쩔맨 것에 새삼스레 화가 치민다. 무슨 죄인처럼 행동할 이유가 없다. 자식들조차 나 몰라라 하는 노인네를 며느리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혼자서 뒷바라지 했으면 오히려 생색을 내야할 판이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새로운 길을 찾았어야 했다.
그해 가을, 택배기사가 물건을 제대로 배달했더라면 난이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항구도시에 사는 친구가 마른 생선을 택배로 보냈다는 전화를 받은 후 난이는 꼼짝하지 않고 집을 지켰다. 오후 한시쯤 물건을 배달한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여섯 시가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택배 물량이 넘치는 때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난이는 택배회사에 전화를 걸어 담당 택배기사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곧장 연락을 취했는데 그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저녁 여덟 시가 지나서 택배회사로 전화했더니 자기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겠다며 난감해했다. 밤 열 시쯤 택배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이제야 택배기사와 통화 연결이 됐는데요, 길을 잘 몰라서 배달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엊그제 들어온 신입사원이거든요. 고객들한테 전화가 빗발치니까 겁을 먹고 손을 놨나 봐요. 아파트 주차장에서 여태 죽치고 있었대요.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급한 물건이면 제가 지금 당장 가져다 드릴게요.”
“그 어리뜩한 기사한테 직접 사과를 받아야겠으니 내일 본인이 가져오라고 하세요.”
다음 날 일찌감치 택배기사가 나타났다. 작심하고 쓴소리를 퍼부을 작정이었는데, 얼굴이 벌개져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남자를 보자 난이도 말문이 막혔다.
주부가 되더니 마치 엄마처럼 자상하게 구는 친구가 김치, 밑반찬, 마른 생선, 김 등을 택배로 종종 보내줘서 난이는 그 횟수만큼 택배기사를 만났다. 부모나 다름없던 이모가 뒤늦게 결혼해서 속정이 깊은 이모부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던 해, 난이는 그 택배기사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연애 기간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남편은 막내였다. 그의 형과 누이들은 시아버지를 모시는 대가로 전세 아파트를 얻는데 돈을 보태 주겠다고 했다. 남편은 그런 조건이 아니더라도 오래전 상처한 아버지를 챙길 남자였다. 남편은 부지런하고 친절한 택배기사였다. “자네만 믿는다”는 이모의 애절한 부탁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아내를 특별히 아끼면서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난이는 그런 남편이 미더워 시아버지를 친정아버지처럼 대하면서 살림을 꾸렸다. 하지만 신혼살림에 손때가 묻기도 전에 남편은 세상을 등졌다.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하루아침에 미망인이 되고 나서도 난이는 시아버지와 한솥밥을 먹었다. 벌써 삼 년째였다. 이모는 하루라도 빨리 수속을 밟아 뉴질랜드로 들어오라고 성화였다. 시댁 식구들은 이 어정쩡한 관계를 정리하려 들지 않았다. 난이는 며느리의 자리를 그만 내놓자고 굳게 결심했다가도 시아버지의 지팡이를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 시아버지는 작년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시어머니 제사 때 제대로 걷지 못하는 제 아버지를 본 시누이가 당장 지팡이를 사서 보냈다. 손잡이에 플래시와 마사지 기능이 있는 접이식 지팡이였다. 시누이가 올케의 마음을 꿰뚫어보고는, 이렇게 거동이 불편한 노인네를 두고 떠나려 하느냐며 무언의 협박을 하는 것 같았다. 느닷없이 배달된 지팡이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던 건 사실이었다. 시아버지는 지팡이에 의지하면서부터 나날이 쇠약해졌다.
난이는 학습지 회사에서 경모를 만났다. 남편이 저승길을 밟으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난이는 학습지 회사에서 오전 열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오십 명 남짓한 선생들에게 각종 교재를 챙겨줬다. 경모는 파혼 경력이 있는 학습지 교사였다. 작년 여름 직원 야유회에서 우연히 말문을 튼 두 사람은 지금까지 비밀교재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 난이는 둘째 시누이에게 가까이 지내는 남자가 있다고 넌지시 고백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남자가 생겼어. 그렇게 안 봤는데, 올케도 별 수 없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결혼할 때 우리 형제들이 모아준 돈을 생각하면 좀 더 모셔도 되지 않나? 굳이 인연을 끊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시누이의 약아빠진 음성을 떠올리며 난이는 공중전화 부스로 종종걸음 친다. 당장 경모를 만나고 싶다. 자식들에게 외면당하는 노인 때문에 인생을 망칠 수는 없다. 시아버지가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동요나 부르다가 외롭게 숨을 거둔다면 그건 당신의 팔자지 내 탓이 아니다. 난이는 혼잣말을 하며 공중전화에 동전을 집어넣는다. 백 원짜리가 쇳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고장 수리 중’이라고 적힌 종이가 이제야 눈에 띈다. 난이의 마음속에서 반짝이던 별 하나가 애처로이 스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