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4화
문밖에서 규칙적으로 새어나오는 가뿐 숨소리에 난이는 눈을 뜬다. 시아버지는 지금 기공체조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난이는 옷을 대충 갈아입고서 주방으로 나간다. 시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서서 다리를 번갈아 들어올리고 있다. 다리를 위아래로 힘겹게 들어 올릴 때마다 시아버지의 합죽한 입도 열렸다 닫혔다 한다.
“그렇게 하면 숨만 차지 운동이 안 돼요. 몸에 힘을 실어서 동작을 크고 정확하게 해야지요.”
“머리를 묶으니까 한결 젊어 보이는구나.”
“밖에 나가면 미혼인 줄 알고 중신 선다는 사람도 있어요.”
오늘 아침에는 청국장을 끓여 먹자며 시아버지가 말머리를 돌린다.
“아침 운동도 할 겸 빨래비누랑 두부 좀 사다 주세요. 빨래비누는 꼭 무궁화표 표백비누로요.”
나갈 채비를 하는 시아버지의 몸놀림이 기공 체조를 할 때보다 훨씬 기운차 보인다. 시아버지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서 난이는 재빨리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누른다.
“경모씨, 미안. 늦잠을 자서 모닝콜을 못했네. 지각했어?”
“늦잠은 무슨, 노인네 눈치 보느라 그랬겠지. 이런 식으로 뜨뜻미지근하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아침마다 깨워줄 여자를 새로 찾을 수밖에.”
경모의 목소리가 가뭇없이 사라진 후에도 난이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않는다. 그의 말은 진담 같다. 순간 경모가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어떤 간이역의 마지막 기차처럼 여겨진다. 이 기차를 놓치면 노인네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폐경기를 맞이할 지도 모른다.
“아이 참, 제가 무궁화표 표백비누 사오라고 했잖아요. 저번에는 맛소금을 사오라니까 다시다를 집어오더니, 머리를 안 쓰니까 자꾸 깜빡깜빡 하는 거예요.”
오렌지 빛깔의 빨래비누를 시아버지에게 들이대며 난이가 신경질을 부린다. 이토록 형편없는 기억력을 가지고 어떻게 혼자 살까.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기공체조만 할 게 아니라 머리 운동도 좀 하세요. 오래된 쇠파이프는 녹이 슬고 찌꺼기가 끼잖아요. 지금 아버지의 머릿속이 녹슨 파이프 같을 거예요. 경로당에 가서 할아버지들이랑 장기를 둔다든지, 성경책이라도 읽으면서 찌꺼기를 걷어내시란 말이에요.”
“네가 내 머릿속을 청소해주면 되잖니.”
잔뜩 당겨 묶은 머리가 일순간에 풀어지는 느낌이다. 시아버지가 빨래비누를 바꿔오겠다면서 지팡이를 들고 허둥지둥 나간다.
창문을 열고 방향제를 뿌렸는데도 청국장의 구리텁텁한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난이는 꽃무늬 조각보를 앉은뱅이책상 위에 펼친다. 언뜻 보면 식탁보 같지만, 바느질도 엉망인데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피륙일 뿐이다. 난이는 바늘집 뚜껑을 연다. 바늘에 실을 꿰고서 방바닥에 포개놓은 헝겊을 한 장 집는다. 꽃무늬 헝겊은 이제 스물 세 장 남았다. 바늘집은 얼굴을 본적이 없는 시어머니가 물려준 유품이다.
“어머니가 결혼할 여자한테 주라고 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물려주신 바늘집이래요. 할머니는 족자나 병풍에 수를 놓는 솜씨가 뛰어났대요. 저희 어머니도 베갯모나 이불에 수를 잘 놓으셨어요. 옛날 어머니들은 누비 일감을 꺼내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면서 시름을 달랬다고 하대요?”
남편은 바늘집을 건네며 수줍게 청혼했다. 나무로 만든 타원형의 바늘집은 고풍스러웠다. 시할머니는 바늘집에 머리카락을 넣어 바늘을 꽂아 두었다고 했다. 바늘집 안에는 세 개의 바늘이 들어 있었다. 난이는 바늘집을 핸드백 안에 넣고 다녔다. 양쪽에 밤색 끈이 달려 있어서 액세서리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바늘집이 가족임을 증명해주는 특별한 물건 같아서 소중히 다뤄졌다. 하지만 그날 남편의 화장(火葬)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바늘집의 끈을 잡고 빙빙 돌리다가 뚜껑이 열리는 바람에 바늘 한 개를 잃어 버렸다. 난이는 남편을 납골당에 모시고 나서 바늘집을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다.
경모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난이는 다시 장롱에서 바늘집을 꺼냈다. 그 무렵 장롱을 정리하다가 꽃무늬 커튼을 발견했다. 난이는 그 커튼으로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십 센티미터인 천을 이백 개 만들었다. 천을 모두 이어붙이는 날 경모의 청혼을 받아들이자는 다소 충동적인 다짐이 피어올랐다. 난이는 그때부터 바늘을 손에 쥐기 시작했다. 시누이와 언짢은 통화를 하면 한 번에 몇 장씩 꿰매고, 말라비틀어진 마늘 같은 시아버지의 치아가 쌀밥 위로 툭 떨어지는 모습을 봤을 때는 며칠 동안 장롱에서 바늘집을 꺼내지 않았다. 시할머니의 손에서 시어머니의 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바늘집이 자신에게는 탈출의 도구로 쓰이는 현실 앞에서 난이는 착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