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08년 봄호.
내가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만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정확히 2011년 1월 19일. 새해가 밝았는데도 연말의 캄캄한 골목에 쑤셔 박힌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았는데 철 지난 ‘문학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걸 왜 여태 버리지 않았을까’,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잡지를 훑어봤다. 표지의 주요 목차에 ‘FOCUS 박완서 소설 『친절한 복희씨』’가 굵은 고딕체로 도드라져 있었으나, 그해 『친절한 복희씨』에 대한 서평이며 인터뷰 기사를 흔히 접했던 터라 그 대담이 살짝 식상하게 느껴졌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우리들의 마음공부는 계속됩니다’라는 제목이 적힌 페이지에 이르렀다. 편집위원과 선생님이 아치울에서 만나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친절한 복희씨』의 표제가 원래 ‘대범한 밥상’이었는데 무슨 요리책인 줄 알까 싶어 제목을 바꿨다는 사연, 나오는 분량은 적지만 주인공 못지않게 애정을 쏟으며 창조하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선생님의 드라마 대본 『청아』를 발굴했다는 내용들이 군데군데 ‘(웃음)’을 달고 펼쳐져 있었다. 이미 읽은 대담일 텐데도 막 배달된 잡지를 들춰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저절로 볼펜에 손이 갔다. 책 속의 질문과 대답을 곱씹으며 밑줄을 긋다 보니 점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느려졌고, 내 가슴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작가가 소위 ‘한물갔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그 작가가 쓰는 언어가 한물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부한 언어를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사라져가는 언어도 많이 살려내서 쓰려고 하는 편이지만 그건 진부한 언어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밖으로 분출되지 않으면 안 될 때, 그때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체험과 상상력이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고 상상력만 과잉되어 있는 작품들은 읽고 나면 좀 허망해요.”
“물론 쓰려고 앉기까지는 한참 걸리지만 머릿속에서 글감들이 몇 가지는 왔다 갔다 해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게 없으면 돈 한 푼 없을 때보다 더 비참해요.”
파란 볼펜 자국이 선명한 선생님의 ‘말씀’이다. 나는 『문학동네』 2008년 봄호를 쓰레기통 대신 책장에 꽂아두고, 한동안 덮어뒀던 창작노트를 펼쳤다. 그런데 사흘 뒤 선생님이 실로 느닷없이 하늘로 떠났다.
오래 전, 간절히 소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당선소식을 듣자 나와 무관한 행운 같았다. 나는 시상식장에서 눈물을 훔치느라 횡설수설하는 풍경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심플하고 유쾌하게! 상패와 상금을 받고 무대 중앙에 섰는데 엄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쟁여둔 수상소감이 죄다 흩어질 판이었다. 나는 얼른 눈길을 돌리며 입을 뗐다. 목소리가 떨리려고 했다. 여유만만한 척하며 아슬아슬하게 말꼬리를 이어가는데 어느 순간, 앞에서 두 번째 줄 가운데 앉아 활짝 웃고 계신 박완서 선생님이 내 눈에 띄었다. 보기만 해도 몸이 개운해지는 그 매력적인 웃음이 내 긴장을 말끔히 걷어갔다. 선생님은 그렇듯 맛깔스런 웃음으로 늦깎이 소설가의 기를 살려줬다. 시상식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으려는데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살포시 손을 잡으며 말문을 열었다.
“어찌 그리 말을 재미나게 해?”
가냘프면서도 심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박완서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리둥절해서 나는 그저 실실 웃기만 했다. 내 귀에는 마치 소설 속 대사처럼 들리던 그 또렷한 한마디가 안타깝게도 선생님이 내게 건넨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선생님의 임종소식을 접한 그해 토요일 저녁, 나는 장례식장 말고 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평소 당신의 소중한 안식처였을 성당에서 내 방식대로 조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당은 호젓했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새 아릿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나는 선생님의 그림자를 오래 어루만졌다. 성당을 나왔는데 왠지 집에 가기가 싫었다. 캄캄한 골목에는 차가운 바람만 어수선하게 떠다녔다. 허한 마음을 다독이며 천천히 걷는데 선생님의 단편 「겨울 나들이」가 오롯이 떠올랐다. “내가 이룩한 생활을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훨훨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무작정 집을 나선 주인공이, 망령 든 시어머니와 아들을 홀로 보살피는 여인숙 주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여인숙을 나설 때 인사를 하자 망령 든 노파는 고개만 살래살래 흔든다.
“너는 결코 헛살지만은 않았어. 암, 헛살지 않았고말고” 하는 것처럼 느꼈다.
「겨울 나들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주인공은 노파의 순한 몸짓에서 약초와도 같은 의미를 캐낸 것이다. 꽃봉오리가 터지는 듯한 그 대목에서 위안을 받은 사람이 어디 주인공뿐일까. 선생님이 『문학동네』 2008년 봄호를 통해 들려준 소탈하고 진심어린 말들, 성당 곳곳에 얼핏얼핏 비치던 당신의 그윽한 눈빛이 내게, 아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결코 헛살지만은 않았어. 암, 헛살지 않았고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