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추억이 그리우세요?

by 김설원

아가씨의 질문을 받고 보니까 그 먹성 좋은 녀석들이 환하게 떠오르네요. 내가 식구들 몰래 밥을 줘가며 키운 돼지들이요. 그해 겨울밤, 바느질을 하는데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그 당시 나는 딸을 넷이나 낳은 처지였답니다. 설마하니 남편이 계집애라고 가르치지 않을까마는, 내가 비상금을 마련해 둬야 언제든 딸들을 위해 요긴하게 쓸 것 같았어요.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떠올린 부업이 ‘돼지 키우기’였답니다. 이웃 할머니 집에 돼지우리가 두 개 있었는데 한 칸에서만 돼지를 길렀거든요. 돼지 한 마리를 키우기도 힘든 시절이었으니까요. 그 할머니네 돼지우리를 빌리자고 생각했지요. 이웃 할머니한테 내 계획을 말하자 흔쾌히 그러마 했어요. 비밀로 해달라는 당부도 디밀었지요. 나는 돼지우리를 빌려주고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할머니한테 맛있는 음식을 식구들 몰래 갖다 줬어요. 그 집 할아버지한테 장에 가면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사다 달라고 청하면서요.

이웃집에 나의 귀여운 돼지가 살고 있었어요. 새끼 돼지를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지요.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돼지우리로 살금살금 걸어가서 밥을 줬어요. 저녁에는 설거지를 후딱 끝내고 돼지를 만나러 갔답니다.

“돼지야, 잘 있었어? 내가 밥 많이 줄 테니까 아프지 말고 무럭무럭 커야 한다?”

내가 조용히 말을 건네면 새끼 돼지는 알았다는 듯 밥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어요. 어른들이 집을 비우면 돼지한테 풀도 뜯어다주고, 우리도 깨끗하게 치웠답니다. 돼지는 수놈을 키웠어요. 수놈이 암놈보다 빨리 자라니까요. 내가 짬짬이 보살핀 돼지는 금세 포동포동해졌어요. 돼지를 육 개월 동안 먹여 키우면 장에 내다 팔 수 있었는데 돈이 꽤 됐어요. 돼지를 팔아서 챙긴 돈으로 새끼 돼지를 또 한 마리 샀지요. 돼지를 사고파는 일은 이웃집 할아버지가 대신 해줬어요. 그 할아버지가 새끼 돼지를 자루에 담아 장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일에 지친 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답니다. 돼지는 일 년에 두 마리씩 키워 팔았어요. 쌈지에 돈이 차곡차곡 쌓이니까 뭘 해도 신바람이 나데요.

그런데 수퇘지를 여섯 마리째 키우던 해 비밀이 탄로 나고 말았어요. 시어머니의 환갑을 며칠 앞둔 때였죠. 비밀을 지키면서 내 부업에 도움을 줬던 이웃집 할머니가 돼지우리를 비워달라는 거예요. 돼지를 더 키워야겠다면서요. 돼지우리를 한 달만 더 사용하면 되는데 갑자기 어디로 옮겨야 할지 난감했어요.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가까이에 사는 당숙모 말고는 맡길 데가 없었어요. 당숙모에게 사연을 털어놓고 내 돼지를 그 집에 맡기기로 했지요. 아침저녁으로 돼지한테 밥을 주려면 신작로를 건너야 했답니다.

그날 오후, 내가 뭐에 씌었는지 한낮에 돼지 밥을 들고서 당숙모 집에 갔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남편을 비롯한 친척들이 사랑방에 모여 있지 않겠어요? 날이 더우니까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말이에요.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남편이 ‘저 여자가 왜 돼지 밥을 들고 여기로 오나’ 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데요.

“왜 환한 대낮에 돼지 밥을 들고 와. 사랑방에 남자들이 잔뜩 있는 줄 모르고. 나, 돼지 키워요, 하고 자랑할 일 있남?”

때마침 부엌에서 나온 당숙모가 당황하며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핀잔을 줬죠. 그렇게 내 비밀이 깨지고 말았어요. 그날 저녁 남편이 부엌으로 불쑥 들어왔어요. 마실 물을 달라기에 얼른 주고 돌아섰죠.

“돼지 잡으까?”

“무슨 돼지를 잡어유?”

“자네가 키운 돼지 말여. 그놈 아주 투실투실하니 잘 생겼더만?”

남편이 물을 달게 마시더니 피식 웃으면서 나갔어요. 며칠 후면 시어머니 환갑이니까 복덩이처럼 굴러온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자는 뜻이겠죠. ‘내가 애지중지 키운 돼지를 왜 가져가? 흥! 돼지를 잡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히 있나’, 나는 부아가 나서 투덜거렸어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속으로만 불퉁거릴 뿐이었지요. 남편이 돼지를 잡겠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더군다나 시어머니 환갑 잔칫상에 그 돼지를 올린다는데요. 약이 오르고 분해도 참아야지 별 수 있나. 그해 내가 마지막으로 키운 돼지로 시어머니의 환갑상을 차려 동네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놀았어요. 내 어여쁜 돼지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나는 잔칫날인데도 한없이 서글펐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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