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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원 Mar 13. 2023

마이클

  그는 ‘아름다운웨딩홀’을 슬쩍 빠져나와, 신호등의 초록불이 깜박거리는 횡단보도를 재빨리 건넜다. “어디 가세요!” 라고 외치는 아내의 달뜬 목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했다. 그는 아름다운웨딩홀을 등지고 성큼성큼 걸었다. 어김없이, 사람들 속에 있으면 식은땀이 나면서 숨이 가빴다.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바람에 부딪치다가, 또 그것에 휘말려 멀리 멀리 떠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바람은 그에게 거친 파도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일지라도 그의 몸에 닿다 하면 무섭게 돌변했다. 그는 진정제를 먹듯 얼른 금영이를 떠올렸다. 아름다운웨딩홀의 아름다운 결혼행진곡에 맞춰 입장할 때 “마이클, 떨지 말고 제 손을 꼭 잡으세요” 라고 익살스럽게 속삭이던 금영이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파릇파릇 부풀어 오르는 듯한 나뭇잎 사이로 아름다운웨딩홀의 빨간 뾰족지붕이 보였다. 


  그의 이름은 두 개다. 호적상의 진짜 이름 권송식과 딸만 사용하는 가짜 이름 마이클. 그는 그럴 수만 있다면 권송식이 아니라 마이클로 불렸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마이클, 마이클로. 58년 동안 그의 분신이었던 ‘권송식’은 말끔히 도려내고 싶다. 택시운전사 권송식, 가해자 권송식, 피고인 권송식…… 들을 때마다 머릿속이 까맣게 타는 듯하던 이름. 마이클은 딸 금영이가 문자메시지로 뭔가를 부탁하거나 기분을 맞춰줄 때 장난기를 섞어 써먹는 이름이다. 그 이름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베란다의 창문을 활짝 열어놔도 좋을 만큼 화창하던 어느 날 금영이가 거실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 딸은 자주 거실과 주방을 오갔다. 풀이 죽은 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이 말도 하고 저 말도 했다. 그는 딸의 마음씀씀이가 기특하면서도 불편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냐?”

  “소설집요. 어떤 작가가 거의 이십 년 만에 내놓은 첫 창작집인데 문장들이 빛나요.”

  “이십 년? 원래 그렇게 책을 내기가 어려우냐?”

  “비교적 늦게 소설가가 됐는데 덜컥 중병에 걸렸대요. 그 병을 이겨내면서 쓴 소설들을 묶은 거예요.”

  “대단하구나. 그 공백기를 어떻게 견뎠을까…….”

  “이 소설에 나오는 마이클이 정말 고마워요. 마치 내 언니를 끝까지 지켜준 것처럼.”

  “마이클?”

  “이십 년 간 어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했던 주인공은 며칠 전 결국 사직서를 냈어요. 여자는 마흔 아홉 살인데 국내 대학 학사 졸업장 밖에 없었어요. 다른 강사들은 젊고, 해외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장도 있고, 어학연수나 외국 거주 경험도 있고…… 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버티겠어요. 원장이 친구라서 지금까지 봐준 건데, 여자의 수업을 신청하는 수강생들이 하나 둘씩 줄다가 석 달째 마이클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아요. 그러니 그만둘 수밖에요. 여자의 곁에 끝까지 남은 사람이 마이클이었어요.”

  “마이클은 강사의 외로움을 외면할 수 없었나? 마이클, 마이클…… 이름이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입과 귀에 쏙 스며든다. 둘은 어떻게 되냐?”

  “마이클이 나오는 페이지를 접어둘 테니까 아버지가 직접 읽어 보세요.”

  나도 마이클 같은 이름을 갖고 싶다고, 내가 마이클이었으면 그 수업을 계속 들었을까 하고 농담하듯 말했는데, 무언가에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가 반가웠는지 그때부터 금영이가 ‘마이클’로 종종 미소 짓게 만들었다. 


  상념에 잠겨 천천히 걷다 보니 럭키아파트까지 왔다. 중고가구점을 운영했던 친구가 살았던 아파트다. 친구는 지지난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정문을 통해 놀이터로 갔다. 주말이면 친구와 곧잘 만나서 캔맥주 하나씩 마시고 헤어졌던 곳. 아이들이 미끄럼틀 앞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아이들만큼이나 푸르른 잎들이 놀이터를 생기롭게 만들어준다. 그는 정자처럼 생긴 공간에 앉았다. 그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자 어떤 새가 삐루삐루 하고 알은 체를 했다. 새들은 어느 나무에 앉아서든 지저귄다. 나무가 큰가 작은가, 열매와 꽃이 많은가 적은가 따지지 않고, 또 같이 어울려 있는 새들의 깃털이 거슬린다고 불평하지 않으면서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명랑하게. 나도 이렇게 살아왔는데, 아니 이렇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나무 바닥에 고여 있는 온기가 눈을 감겨준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밤, 그는 택시 승강장에서 곧 도착할 심야 고속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가늘다 굵어지다 하면서 세상을 흥건히 적셨다. 이십 분 늦게 도착한 고속버스에서 예닐곱 명의 승객이 내렸다. 그는 눈에 잠이 가득한 군인을 태워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려다 줬다. 그날은 비까지 내리는 궂은 날씨였는데도 손님을 심심찮게 태웠다.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래, 설마하니 세상이 진흙구덩이기만 할까…… 그는 비행장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원래 비포장도로였는데 올봄 아스팔트로 변신한 길이었다. 비행장이 빤히 보이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시내로 통하는 길이 나왔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이었다.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희미한 가로등은 있으나마나였다. 그는 몸을 응등그리며 뻐근한 눈을 크게 떴다. 액셀을 밟아도 차는 둔하게 움직였다. 빗줄기가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어떤 모험의 마지막 관문인 것 같은 으스스한 공간을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긴장하니까 오히려 눈이 자꾸만 감겼다. 어느 순간 눈앞에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그것이 빠르게 스쳐갈 때 핸들을 잡은 손에 기묘한 느낌이 전해졌다. 외마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검은 물체는…… 고라니나 멧돼지…… 아니, 그보다 몸집이 컸다. 그렇게 얼마쯤 달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핸들을 돌려 사고지점으로 갔다. 최대로 볼륨을 높인 빗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만치 길바닥에 누군가가 엎어져 있었다. 주인의 손을 놓친, 활짝 뒤집혀진 우산이 비바람에 떠밀려갔다…… 전치 10주의 상해, 아스팔트 위의 흔적들, 합의금, 초범, 그리고 합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을 참작해 그나마 중형은 피했다.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찾아온 불행이었다. 


  양복 주머니에 무심코 손을 집어넣자 무언가가 바스락거렸다. 뭐지…… 아…… 오늘 아침 금영이가 양복 주머니에 넣어준 땅콩카라멜이다. 오늘 예식장에서 마음이 들썽거리거나 입이 마를 때 먹으라고 했다. 이게 처음은 아니다. 뒤늦게 택시 운전으로 밥벌이를 하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웠는지 금영이는 원통형의 작은 플라스틱 통에 땅콩카라멜을 가득 담아 운전석 옆에 놨다. 졸음이 오거나 입이 심심할 때 먹으라면서. 금영이는 그 플라스틱 통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이것 말고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듯이. 그는 땅콩카라멜을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낱개 포장한 땅콩카라멜은 모두 일곱 개다. 금영이가 일부러 개수를 ‘7’로 맞췄겠지, 행운을 부르는 숫자로. 그는 빨간색 포장지를 뜯어 땅콩카라멜을 입에 넣었다. 단단한 것이 이내 부드럽게 씹힌다. 땅콩카라멜이 흐물흐물해지면서 달고 고소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그가 이번에는 파란색 포장지를 뜯어 땅콩카라멜을 골똘히 쳐다본다. 너의 몸은 가로 3센티미터, 세로 2센티미터쯤 될까. 내 인생에 이 크기만큼의 기회가 아직 남아 있으려나. 그 기회는 이렇듯 고소한 맛을 내게 안겨줄까……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다. 금영이네. 그는 얼른 문자메시지를 열었다. 

  ― 언제까지 건강하게 제 곁에 있어줄 거죠, 마이클?

  그는 땅콩카라멜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오늘 집에 가면 마이클은 어떤 마음으로 어학원 강사 곁에 끝까지 남았는지, 또 둘은 어떻게 됐는지, 소설책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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