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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원 Mar 01. 2023

계속 달려도 되는 거야?

  벌써 봄내음이? 어딘가에 숨어 향기만 풍기는 봄을 찾으려는 듯 나는 사방을 둘러봤다. 입춘, 정월대보름, 그리고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간다는 우수도 지났기에 봄이 바싹바싹 다가오고 있음을 머리로는 알았다. 매일 아침 강변공원을 거닐 때 바람결이 좀 거칠긴 해도 햇살의 감촉은 분명 다르다는 걸 느끼기도 했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봄이구나!” 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지 않았기에 나의 계절은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서울 나들이를 하려고 집을 나섰더니 봄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와락 껴안는 거였다. 그야말로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행인들의 옷차림도 가벼웠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경주역으로 향했다. 

  주저 없이 경주로 보금자리를 옮긴 후 한 달에 한 번쯤 서울행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20년 넘게 살았던 서울에는 동기간 같은 벗, 단골 음식점이나 헤어숍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에 도착하면 일단 머리부터 매만진다. 그리고 다정한 지인들을 만나 메밀묵이나 국시, 청국장과 보리밥을 먹고 돌아온다. 어떤 지인은 서울까지 와서 무슨 청국장이냐며 좀 더 근사한 음식을 먹이고 싶어 하지만 나는 경주에선 맛볼 수 없는 그 맛이 그리운 것이다. 이렇게 날을 잡아 규칙적으로 발걸음을 하다보면 서울, 경주 두 도시가 더욱 좋아진다. 서울은 서울만의 독특한 ‘활기’를 품고 있어서. 경주는 그 활기에서 벗어난 낭만적인 고요를 한결같이 간직하고 있기에. 

  이번에는 친구가 서울 나들이에 동행했다. 그녀는 나보다 일찍 서울을 떠나 ‘별의 도시’에 둥지를 텄다. 딱 2년만 살아보겠다고 했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눈치였다. 밤이면 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니 오죽할까. 경주에서 별의 도시까지는 무궁화호로 20분이면 닿았다. 우리는 수서역에서 내려 각자 시간을 보낸 후 낮 1시쯤 만나 10년 가까이 드나드는 음식점에서 낚지볶음과 낚지파전을 먹었다. 맛있다,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커피까지 마시고 슬슬 걸어 수서역에 도착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이 여행객으로 붐비는 대합실. 확실히 코로나에 대한 긴장감이 떨어져 한결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몸짓들. 우리는 열차 출발 시간까지 좀 기다려야 했다. 나는 온라인서점에서 책을 주문하고, 또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백합으로 멋을 부린 스카프를 샀다. 다분히 충동구매였다. 친구는 호두과자를 사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수서역에서 파는 호두과자가 제일 맛있다면서. 

  “먹어 봐.”

  “배불러. 난 호두과자 별로야. 한두 개 먹으면 입이 딱 닫혀.”

  “호두과자가 별로라니. 이건 쌀 호두과자라 더 맛있어. 바삭바삭하고.”

  친구는 호두과자를 호호 불어가면서 먹고, 또 먹었다. 


  동대구역에서 내려 별의 도시로 가는 무궁화호를 탔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탑승했다. 친구 집에서 하룻밤 묵을 계획이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배낭을 메고 헐레벌떡 기차에 올랐다.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 뻔했다. 아주머니가 기차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여태 당신을 기다렸다는 듯 무궁화호가 서서히 꿈틀거리다 속력을 냈다. 

  경주에 살면서 색다른 재미는 바로 무궁화호, 누리로를 타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것이다. 누리로는 무궁화호급 기차로서 작년에 새로 선보였는데 한마디로 말쑥했다. 객실도 고속열차 못지않았다. 어떤 날은 무궁화호, 어떤 날은 누리로에 나를 맡긴 채 해운대도 가고 태화강도 갔다. 내게는 어둑어둑한 지하를 수시로 통과해 독서를 방해하는 고속열차보다 지상으로 달리면서 역마다 서는 무궁화호, 누리로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고속열차에 비하면 느림보지만 사시사철 바뀌는 풍경을 선사하며 눈 호강을 시켜주니까. 이제 산과 들판이 푸릇푸릇해지겠구나, 복사꽃도 피겠어, 소들도 볕을 쬐러 나왔나 보네, 구름이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순간 철길 위의 커다란 쇳덩어리가 기차와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듯한 소리가 강렬하게 들려왔다. 승객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물론 내 입에서도 아아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 객실을 둘러보고 다음 칸으로 갔던 승무원이 나타났다. 

  “방금 무슨 소리가 났죠?”

  “예, 뭐가 박살나는 소리였어요!”

  승무원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기차는 계속 달렸다. 몸이 살짝 기울어지는 듯 하면서 곡선의 철길을 달릴 때는 이러다 어느 순간 탈선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옥좼다. 기차가 처참한 몰골로 뒤집혀 있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광경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기차는 이따금 철커덕 철커덕 하는 소리와 다소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달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너는 겁이 안나?”

  무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친구에게 따지듯 물었다. 

  “잘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안전 불감증인지, 아니면 누구보다 예민한 청각이 기차의 이상 없음을 확인했는지, 이것도 아니면 요즘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더니 삶에 대해 반쯤 체념한 상태인지…… 친구는 별 동요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와중에 쌀로 만들었다는 호두과자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근데 왜 방송을 안 해? 무슨 말이든 해서 승객들을 안심시켜줘야 하잖아? 그나저나 이렇게 계속 달려도 되는 거야?”

  내가 친구에게 속삭이듯 말하자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때 승무원이 등장했다. 아까 가장 늦게 탑승한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서더니 “무슨 일인지 방송을 해줘야죠!” 라고 소리쳤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다른 승객들도 웅성웅성. 우리 사회에서 어처구니  없이 벌어진 크고 작은 사고들이 그 아주머니의 머릿속에도 선명히 떠올랐을 터였다. 승무원이 다시 어디론가 가더니 금세 돌아와서는 승객들을 향해 뭐라고 뭐라고 했다. 마스크를 쓴 데다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안전합니다’라는 말이 어렴풋하게 들리기는 했다. 어쩌면 환청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디 기차가 안전했으면 하는 마음이 불러일으킨 가짜 말소리. 

  마침내 기차가 멈췄다. 평소에는 서지 않는 역이었다. 우리가 앉은 2호차에서만 그런 문제가 발생한 듯 기관사와 승무원이 2호차의 몸체를 살피며 말을 나눴다. ‘그냥 여기서 내려 버릴까’, 이런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순간의 판단이 내 인생을 바꾼다…… 하지만 마음을 접었다. 나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무궁화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15분 정도만 더 달려가면 별의 도시에 도착한다. 그곳이 마치 구원의 도시 같았다. 만약, 결국,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호두과자가 마지막으로 먹는 먹거리가 되겠구나.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나는 호두과자 하나를 입에 그대로 넣고 우물우물 천천히 씹어 먹었다. 달콤한 팥과 알찬 호두가 차지게 엉기면서 묘한 안정감을 안겨줬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맛이었다.


  “기차가 멧돼지랑 부딪쳤나?”

  “넌 귀가 어떻게 됐냐? 그게 무슨 멧돼지야. 아주 크고 단단한 물체였어.”

  마침내 별의 도시에 내려 숨을 길게 내쉰 후 걸어가는데 뒤에서 이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왜 방송을 해주지 않느냐고,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고, 도대체 기차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냐며 불만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방금 하차한 승객들은 말썽을 일으킨 기차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태화강이 종착역인 기차 안에서 건강하게 숨 쉬고 있을 얼굴들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무쪼록 목적지까지 무사히 닿아 가족 또는 연인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드시라고. 달리는 기차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방송을 통해 정확한 발음으로 상황 설명을 해줬다면, 예를 들어 “승객 여러분, 열차 이상으로 가장 가까운 역에 정차하여 점검하겠습니다. 역까지는 오 분 정도 소요됩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라고 말해줬더라면 나, 아니 우리의 불안은 반으로 줄어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당연한 배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까. 땅에서, 바다에서 그 숱한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고여 있는 물 같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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