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포도의 억척스러운 기질이 마음에 들어. 포도는 인간의 섬세한 손길을 마다하고 고통을 스스로 견딘다더라. 자갈밭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저한테 필요한 영양분을 스스로 찾는다는 거야. 척박한 환경에서 크는데 맛은 어느 과일한테도 뒤지지 않는 걸 보면 참 기특하잖아?”
딸의 졸업식이나 입학식 아침이면 엄마가 즐겨 입에 올린 포도 이야기다. 포도를 의인화한 말투는 자못 진지했다. 포도를 앞세워 딸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면서도 정작 학교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는 주부이자 가장이었기에 학교의 굵직굵직한 행사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일찍 철이 들어버린 Q는 그 불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가 딸을 포도처럼 키우고 싶어 했다는, 아니 그렇게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엄마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이 필요한 영양분을 스스로 찾으며 성장하기 바랐던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의식(衣食)은 충분히 제공해 주면서. 가장의 책임을 다하느라 자식을 욕심껏 감싸지 못했다기보다, 그게 엄마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가정교육이었던 듯하다. 이런 엄마의 양육 방식에 길들여진 Q는 스스로 ‘여기까지’라는 선을 그어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떳떳하게 겉돌았다.
녹음실의 마이크를 조절하는데 뜬금없이 ‘엄마의 포도’가 떠올랐다. 한 시간 후면 입학식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다. 녹음실에 들어온 지 이십 분이 지났다. 순서를 기다리는 대기자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한 평 남짓한 공간, 사무용 집기는 책상과 컴퓨터가 전부다. 보디빌더의 적갈색 피부를 연상시키는 벽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장도 낮다. Q는 마이크를 코 높이에 맞췄다. 마이크와 입 사이에 주먹이 들어갈 만큼 거리를 두라고 했지. ‘아에이오우’를 반복하면서 안면의 긴장도 풀어준다.
“가, 갸, 거, 겨, 이렇게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읽어주세요. 다음 페이지의 짧은 문장들은 순서대로 읽으시고, 맨 뒷장의 내용은 천천히 낭독해 보세요. 침 넘어가는 소리나 쌍시옷, 쌍디귿 같은 된소리는 안 됩니다. 문장 안에 그런 소리가 끼어들면 저희가 교정 작업할 때 잘라내지 못하거든요. 마이크의 위치는 자신의 코 높이로 하고, 마이크와 입 사이에 주먹이 들어갈 만큼 거리를 두고 낭독하시는 게 가장 좋아요. 이 빨간 단추를 클릭하면 녹음이 시작됩니다. 녹음을 마치면 다시 빨간 단추와 클로즈를 누르시고 파일 이름에 본인 성함을 적으세요. 그리고 저장.”
Q는 휴대전화를 열어 ‘음성녹음’에 저장된 담당 직원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녹음하는지 충분히 설명을 들었어도 곧장 까먹지 않을까 싶어 직원 몰래 녹음해 뒀다. 이게 있으니까 마음이 좀 편해진다. 녹음실 직원이 책상 위에 올려둔 A4 용지는 세 장이다. 가, 규, 보, 쉐 따위의 낱자가 첫 장에 빼곡하다. 뒷장에는 한 줄짜리 문장이 오십 개쯤 인쇄되어 있었다. ‘말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라는 제목을 앞세운 신문 칼럼이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다. 만만히 볼 실기시험이 아니다. 의욕으로 부풀어 있던 마음에서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지난 주 토요일,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그 현수막을 봤다. 점자도서관에서 낭독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웨딩마치가 울리는 꽃밭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은 친구를 축복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휑했다. 그 마음 언저리에 고드름이 맺히는 듯한 기분도 들고…… 그 쓸쓸함은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자리를 넓혀 갔다. 점자도서관에서 만든 현수막을 보는 순간 나도 어딘가에 꽉 묶이고 싶다는 간절함이 Q의 허한 마음속에서 촛불처럼 일렁였다. 당장 점자도서관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가 말하길, 시각장애인들이 독서할 때 점자도서보다는 녹음도서가 편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녹음해줄 낭독봉사자를 모집하는 거라고 했다. 일단 점자도서관에서 음성 테스트를 받은 후 낭독이 가능한지 결정한다고. '테스트’라는 말을 들으니 왠지 기운이 났다.
알이 굵은 포도가 눈앞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섬세한 손길로 키우지는 않았지만, 자갈밭에 뿌리를 내린 포도 곁에는 태양과 바람이 있었겠지. 달빛과 별빛도. 3월의 풋풋한 길목에서 정이 담뿍 든 친구는 신혼여행을 떠났고,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맑고 여린 웃음소리가 출렁이고, 새싹들은 영차영차 흙을 밀어 올린다. 나에겐 음성 테스트가 일상이란 나무에 오돌토돌 맺힌 꽃봉오리일까. 이 시험에 합격하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따스하고 고소한 소설을 낭독해야지. 만개한 목련처럼 환하고 고운 목소리로. Q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어린다.
실전에 앞서 읽기 연습을 해보자. Q는 음정을 가다듬었다. 가, 갸, 거, 겨, 뷔, 붸, 쇼, 쇄…… ‘뷔’나 ‘붸’나 어째 발음이 똑같다. ‘쇼’를 읽는데 침이 꼴깍 넘어간다. 버, 베, 벼, 보, 뫼…… 목소리가 점점 낮아진다. 페이지를 넘겨 짧은 문장을 읽어 본다. 칠월 칠일은 평창친구 친정 칠순 잔칫날, 우리 집 옆집 앞집 뒷창살은 홑겹창살이고…… 발음도 부정확하고 혀도 제멋대로 움직인다. 헷갈리고 틀리기 쉬운 문장들만 모아놓은 듯하다.
Q는 심호흡을 했다. 입맛을 다신 뒤 조심스럽게 빨간 단추를 눌렀다. 녹음 시작. 가, 겨, 새, 고, 교, 위…… 음정이 너무 낮잖아. 글자를 삼켜 버릴 것 같아. ‘븨’를 ‘브’로 읽었어. 왜 이렇게 입 안에 침이 고일까. 침 넘어가는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는데…… Q는 속으로 중얼대며 머리를 뒤로 젖힌다. 사, 새, 여, 츠, 췌, 쵸…… 혀가 꼬인다. 마치 울먹이는 것처럼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숨이 차다. 이건 낭독이 아니라 웅얼거림이다. 마음속에서 다그치는 목소리까지 들려와 실수 연발이다. 잘못 읽은 문장에 연연하다 보니 발음이 더 거칠어진다. 합격하기는 글렀다.
음성 테스트가 끝났다. 그래도 마지막 페이지의 칼럼은 침착하게 읽었다. Q는 녹음실에서 나와 담당자를 찾았다. 책과 시디, 비디오테이프로 둘러싸인 방에 그가 앉아 있었다. Q는 활짝 열려 있는 출입문을 두드렸다.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로 장기를 두던 남자가 벌떡 일어선다.
“녹음 다 하셨어요?”
“제가 뭘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머릿속에 멍하네요.”
“처음엔 다 그래요. 여기에 전화번호 적어주세요.”
“언제쯤 결과를 알 수 있을까요?”
“늦어도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연락이 갈 겁니다.”
“떨어지면 음성 테스트를 한 번 더 받아볼 수 있을까요?”
그가 눈웃음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수 높은 안경 때문에 눈이 더 작아 보인다. 그의 눈을 보자, 뛰어난 달리기 선수인 타조의 뇌가 제 눈알보다 작다는 미심쩍은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왠지 그의 머릿속에도 눈동자만한 까만 뇌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을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