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저귀 때문이야…….”
여동생이 축축한 음성으로 말끝을 흐렸다. ‘기저귀’란 단어가 여동생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주변이 온통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기저귀가 아버지의 말라비틀어진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는 걸 보는데 견고한 무엇이 움푹 꺼지는 것 같았어. 내 기분이 이런데 아버진 오죽했을까. 그때부터 기력이 부쩍 떨어졌지 싶어…….”
툭 건드리면 와락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여동생이 말을 이었다.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으면 좋으련만…… 결국 제 언니를 탓하는 원망조의 독백.
“그날 아버지랑 통화하는데 시래기 무침이 먹고 싶다더라. 시래기를 무쳐서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시래기 무침이 생명 연장의 음식인 듯, 오로지 너만이 구할 수 있는 그것을 나 몰라라 했기에 아버지가 숨을 거뒀다는 투로 말하는 여동생. 시도 때도 없이 제 언니에게 전화해서는 아버지와 얽힌 시간을 회상하거나, ‘너 때문에 죽었다’는 식으로 책임을 묻는 ‘회임병’, 회상과 책임에서 한 글자씩 떼어내 S가 지은 병명이다. 회임, 아이를 배다. 여동생의 행동이 ‘회임’의 사전적 의미와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여동생의 뱃속에는 끝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아버지가 살고 있었으니까. 원래부터 여동생이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둘은 어디서든 만나면 서로 데면데면했다.
여동생은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많이 흐느껴 울고, 영정사진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수 년 동안 작성한 가계부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일기장도 죄다 가져갔다. S 또한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은 그것에 욕심을 냈는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여동생은 회임한 여자가 입덧을 하듯 지독한 그리움을 휴대전화에 대고 쏟아냈다. 낮에는 직장인으로서 본분을 다하다가 한밤중이나 새벽이면 회임병 환자로 돌변해 S를 귀찮게 했다. S는 그게 회임병이든 뭐든 애도의 시간을 제대로 보내야 정상 체온을 되찾을 것 같아 고분고분 들어줬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찐득한 슬픔도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아버지가 시래기 무침을 먹고 싶어 했다던 날, S는 ‘多多페스티벌’ 행사로 분주했다. 행사 마지막 날이어서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다니느라 점심도 굶었다. 오후 두 시 무렵 여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때마침 ‘두 얼굴의 베트남’이란 특강을 앞두고 있어서 솔직히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글로벌 산학협력 파트너인 베트남 NGO 단체의 원장을 어렵사리 초청한 터라 학생 청중이 없으면 낭패였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특강 시간이 다가오는데 휑한 세미나실. 한 달 전부터 강의 시간마다 홍보하고, 학교 홈페이지에 알리고, 학과 학회장들에게 부탁했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그때는 어떻게든 세미나실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은 아버지에게 집착하는 여동생과 달리 S의 마음은 의외로 차분했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픔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언제 한꺼번에 터질지 몰랐지만 당장은 견딜 만했다. 마음이 냉탕과 온탕을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지 않으니까 무엇이든 멀리 보게 됐다. 어떤 손길이 내면을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다. 슬픔에 끌려다니다 어느 순간 오감이 둔감해져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고통을 겪지 않도록 꽉 붙잡아주는 악력.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S는 그렇게 맛을 보고, 냄새를 맡고, 바람의 온기를 느끼며 지내다 불현듯 복병을 만났다.
그날 가로수를 따라 걸어가는데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가까이 있는 하나은행으로 몸을 숨겼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기가 뭣해서 자동화기기로 갔다. S는 체크카드를 꺼내 입출금 거래 내역을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백만 원이 입금됐기 때문이다. 순간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 지금까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착각한 게 아닐까. 그 실감에 소름이 끼쳤다. 그렇게 얼마쯤 몸의 전원이 꺼진 것처럼 있다가 그제야 입금 날짜를 봤다. 아, 생일…… S의 생일 전날 아버지가 전화해서는 돈을 조금 송금했으니 친구들이랑 점심이든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그야말로 밥값이려니 하고, 그 돈을 날름 꺼내 쓰기가 좀 그래서 놔뒀다가 까맣게 잊은 거였다. 그 일이 있고 두 달이 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죽음의 발소리를 또렷이 듣고 있었을 아버지는 장녀의 마지막 생일을 챙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S는 자동화기기 앞에 무너지듯 앉아 마음속에 차곡차곡 쟁여둔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두 번 치른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알뜰살뜰한 주부였다. 돌아가시기 서너 해 전부터 그랬다. 이십 년 가까이 살았던 연립주택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그만큼 오래된 가구들을 애지중지했다. 어쩌다 보니 명절이나 돌아와야 발걸음 하는 고향집은 볼 때마다 그윽해지고 빛이 났다. 아버지는 김치도 손수 담갔다. 총각김치며 열무김치, 파김치를 넉넉히 담아 S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주부 아버지는 무엇보다 제사나 차례 음식에 정성을 들였다. 특별한 날이 다가오면 미리 준비해둔 재료로 탕, 식혜, 전, 갈비찜을 만들었다. S의 눈에 그 모습이 청승맞아 보여 음식 장만은 제가 할 테니 놔두시라고 볼멘소리를 하면 “내 집 살림에 신경 쓰지 마라” 면서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는 혼자 살면서 마치 대가족을 책임지는 주부처럼 굴었다. 어쩌면 그런 ‘주부 역할’은 바이러스처럼 몸속으로 파고드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아버지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고독으로 빚은, 말년의 창작물 같은 고향집을 정리하다가 S는 베란다의 붙박이장에 앞에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붙박이장을 열고 보니 벨트와 지갑 세트, 각질 제거용 수면 양말, 칫솔, 보온매트, 찻잔, 미니돌솥, 방향제, 속옷, 종합비타민, 차렵이불, 넥타이, 액체 세제 등등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당신 손에 들어온 그대로, 포장도 뜯지 않고. ‘아끼다 결국 맛도 못 보고 떠나셨네’, S는 혼잣말을 하며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따금 새소리가 들려오는 적막한 오후였다. 그렇게 붙박이장을 열어둔 채 얼마나 있었을까. 어릴 적 아버지가 누워 있을 때면 가슴에 귀를 대고 듣곤 했던 당신의 심장박동 소리가 어떤 형체로 느껴지며 생생히 살아났다. 왠지 그것은 붙박이장의 물건들이 만들어내는 소리 같았다. 손도 대지 않은 새 물건들이었지만, 시간이 쌓이고 쌓인 퇴적물처럼 태곳적 공기가 감돌면서 동동동…… 여리게 들려오는 작은북 소리, 아버지의 심장박동. “아버지, 지금 내 곁에 있나요?” S는 어떤 유품보다도 붙박이장에 가득한 물건들에게서 아버지를 온전히 느끼며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