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설원 Mar 27. 2023

선표 어머니

  포항세관 앞에서 멈춘 시내버스가 이십분 째 정차 중이다. 기계 결함으로 잠시 정차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뜬 운전기사가 무슨 도구로 시내버스 어딘가를 툭툭 건드리고 다시 올라와서는 시동을 끄고 켜기를 반복한다. 시동이 걸린 버스가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S의 입에서도 덩달아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 한 정거장만 가면 롯데백화점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버스에서 내려 걸어갈 걸 그랬다. 약속시간을 지키기는 글렀다. 

  사흘 전 선표 어머니가 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선생님, 선표가 학원을 그만 두고 싶답니다. 선표 어머님이 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다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원장이 부른다기에 갔더니 딱딱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맥이 풀렸다. 그날 국어시간에 기말고사 예상 문제를 뽑아 학생들에게 풀도록 했다. 그런데 교실 한가운데 앉아 있던 선표가 연필을 탁 내려놓더니 가방에서 만화책을 꺼냈다. S가 황당한 표정으로 지금 뭐하느냐고 묻자, 선표의 살짝 삐뚤어진 입에서 기말고사를 포기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기말고사 준비에 진력이 났을 학생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선표를 쳐다봤다. 

  “기말고사 포기했으니 수업 시간에 만화책이나 읽겠다고?”

  S는 선표의 손에 들려 있던 만화책을 낚아채 교탁 위로 집어던졌다. 선표가 눈을 날카롭게 뜨면서 마지못해 연필을 집더니 문제의 답란마다 ‘몰라’라고 휘갈겨 썼다. 반사적으로 뻗은 S의 손이 시험지를 쫙쫙 찢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그날 필요 이상으로 선표에게 화를 내기는 했다. 선표의 고집스런 눈매에 남편의 얼굴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S는 현재 남편과 별거 중이다. 그래서 작년 연말에 포항으로 거처를 옮겼다. S에게 포항은 현실감이 없는 도시였다. 이따금 지도나 매체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뿐 어떤 아득함을 불러일으키는 생의 마지막 개척지 같은 땅. 그 까마득한 거리감이 오히려 S를 강하게 끌어 들였는지도 몰랐다. 별거의 원인은 임신이었다. 남편이 줄기차게 임신을 거부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 신분으로 학생들에게 시 창작을 가르치고 있는 남편은 ‘불안정한 위치’ 운운하며 아버지 되기를 한사코 미뤘다. 

  “내년이면 내 나이가 서른여덟이야. 대체 어쩌자는 거야?”

  “내가 이번 달에 받은 수강료가 얼만 줄 알아? 정확히 백이십오만사천사백원. 여기서 차이가 나봤자 몇 천원이야. 이 강의도 다음 학기에 끊길지 어쩔지 모르고. 이런데도 아이? 나중에 애한테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내가 벌겠다잖아. 책임지고 키우겠단 말이야.”

  “양육은 공동 작업이야. 아직은 부모라는 굴레에 갇히고 싶지 않다.”

  “아이를 낳아보지도, 키워보지도 않은 남자가 무슨 시를 쓰겠다고 설쳐대?”


  오늘 롯데백화점 9층 본스시에서 오후 2시에 선표 어머니와 만나기로 했다. 자기는 그때 말고는 시간이 없다면서 늦은 점심을 먹잔다. 생각만 해도 불편하고 입맛이 떨어졌다.  

  한자 ‘本’이 느티나무처럼 보이는 ‘본스시’에 들어서자 어떤 여자가 S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쪽이 이쪽을 한눈에 알아봤듯 S도 저 여자가 선표 어머니인 줄 알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타고 오던 시내버스가 고장이 나서요.”

  S는 공손히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선표 어머니가 자기도 방금 왔다면서 미소 지었다. 학부모가 선생을 밖으로 불러낸 적은 없었는데 단단히 쐐기를 박을 모양이다, 언짢은 소리를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라, 군사부일체는 이제 썩어버린 말이 됐다면서 혀를 차던 수학 선생의 목소리가 벌떼처럼 윙윙거렸다. 

  “선생님, 세트메뉴를 주문할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이 커플세트요. 연어샐러드, 호박죽, 모둠 튀김에 알밥까지 나오네요.”

  선표 어머니가 메뉴판을 보여주며 입맛을 다셨다. 메뉴판 꼭대기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족‧커플 세트’ 라고 빨갛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관계가 아닌데 어떻게 세트 메뉴를 먹나요. 

  “선생님, 우리 선표 때문에 속상하셨죠. 그 얘기를 듣고 정말 부끄러웠어요.”

  선표 어머니의 차분한 목소리가 실내를 더욱 조용하게 만들었다. 

  “선표를 따로 불러서 왜 그랬는지 묻고 타일렀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이 좀 짧았습니다.”

  선표 어머니가 의외로 다정해서 내심 안심이 됐지만, 이런 태도가 어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S는 저자세로 대꾸했다. 그때 종업원이 꽃잎 모양의 사기그릇에 담긴 전복죽을 가져왔다. 

  “어서 드세요, 선생님. 이런 날이 아니면 전복죽을 못 먹잖아요. 아, 나만 그런가.”

  선표 어머니가 활짝 웃더니 전복죽을 아끼듯 먹는다. 전복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뜻밖에도 식욕을 돋웠다. 

  “지난 번 중간고사 때 선표 국어점수가 많이 올랐어요.”

  S는 학부모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고, 생색내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제가 이래 뵈도 네 식구를 거느린 가장이라 애들 성적 챙길 짬이 없어요. 부모 몫의 교육이 분명히 있는데 수강료나 송금하고 있으니 빵점짜리 엄마고 학부모죠.”

  아까 그 종업원이 음식 카트를 밀고 왔다. 연어샐러드, 튀김, 생선초밥, 장국 등을 한데 놓으니 무슨 꽃처럼 화사했다. S는 새우초밥의 주황색 꼬리에 눈길을 줬다. 

  “저는 오히려 선생님이 시험지를 찢으면서 혼냈다는 말을 선표한테 듣고 바로 이분이다, 생각했어요.”

  S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커플 세트를 함께 먹으면서 대화를 나눌 분요.”

  선표 어머니의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어서 S는 잠자코 듣기나 했다. 

  “제가 초등학교에 급식 재료를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트럭을 몰고 돌아다니다 보면 금세 하루가 저물어요. 어느 날 남편이 계속 누워 있는 거예요. 집에서 잠이나 자고 있다고 잔소리를 퍼붓는데도 기척이 없어요. 흔들어 깨웠더니 무슨 연체동물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데요. 바로 병원으로 갔죠. 어디서 넘어졌는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편 머리 안에 피가 고여 있었어요. 그런 상태로 하루를 보냈으니…….”

  S는 선표 아버지의 뇌에 이상이 생긴 것보다 선표 어머니가 트럭을 몰고 다니며 일한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갔다. 심줄이 툭툭 불거진 그녀의 거친 손으로 자꾸만 시선이 닿았다. 굽은 데가 없이 바르던 선표 어머니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선생님, 우리 선표를 지금처럼 가르쳐 주세요. 못되게 굴면 매를 들어도 좋아요. 저번에 우연히 선표가 쓴 글을 봤어요.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셨대요.” 

  S는 한 달에 두 번쯤 학생들에게 글감을 주고 짧은 글을 써보게 했다. 칭찬을 받았다는 선표의 문장들이 S의 머릿속에 띄엄띄엄 떠올랐다. 밤낮 가족을 위해 일하는 엄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글이었다. 엄마를 나무에 빗댄 묘사가 눈에 띄어 학생들에게 읽어준 기억도 났다. 

  “저는 선표가 쓴 글들을 훔쳐 읽는 재미로 살아요.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해서 엇나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글을 보니까 안심이 됐어요.” 

  S는 이제야 선표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파마머리, 쌍꺼풀이 없는 밋밋한 눈, 둥그스름한 턱, 삼겹살을 얹은 상추쌈이 한입에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작은 입. 그런데도 ‘미인’이라는 느낌이 들어 왜 그렇지? 하고 다시 봤더니 얼굴 전체에 흐릿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공들여 잘 빚어놓은 듯한 이목구비 같은 미소.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별거라는 담장이 눈앞에 그려졌다. 인생은 문제풀이의 연속이고 아직까지는 정답을 잘 골라낸 것 같은데 이번 문제는 난이도가 높다. 국어 문제를 풀 때 지문을 면밀히 읽어보면 그 안에 답이 있다고, S는 학생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남편과 지어올린 결혼이라는 지문을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보면 정답을 골라낼 수 있을까. 시험 종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난이도가 높은 만큼 배점이 큰 문제의 정답을 찾아낼 수 있기 바라며 S는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

이전 05화 염소치즈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