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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Sep 01. 2019

서광일 시 '복숭아'

아버지라는 사내

  비닐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딪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다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만에 사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 흐르는 단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껏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한 사내가 복숭아를 담은 비닐봉지를 매단 채 자전거를 몰고 가는데, 그만 봉지가 터져버린다. 시인은 <문득> 복숭아들이 길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마치 우르르 교문을 빠져 나오는 여고생 같다고 생각한다. 복숭아에서 여고생을 연상하지 않았어도 이 시가 태어났을까. 아마도 사내는 고교생 자녀를 두었음직한 연령대였을 거다. 

  시인이 보니 자전거를 몰던 사내의 다리가 정상이 아니다. 소아마비인지 두 다리의 길이가 같지 않다. 시인은 <곰곰> 생각한다. 그리고 진술한다. 과일봉지가 새는지 몰랐던 까닭이 나오고, 어려웠던 시절이 그려진다, 짓무른 복숭아라도 맛있게 먹어줄 식구들이 그려진다. (진술내용이 사실인지 추측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시> 자전거를 보니 바퀴가 탱탱하다. 여고생 딸내미를 짐칸에 앉혀도 까딱없을 만큼 탱탱해 보였을 것이다. 가난한 신체불구자 아버지는, 그래서, 더 이상 초라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서광일 시인. 1973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 199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2000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현재 극단 [작은 신화]에서 연극배우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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