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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Sep 04. 2019

조정인 시 ‘어머니의 나무주걱’

흰 쌀밥처럼 쌓이고 스미는 사랑

   어머니의 노櫓, 나무주걱은 아래쪽이 닳아 있고 그곳에 뜬 하현달은 하염없었다.

  
  쌀을 퍼서 물에 담근다 한바닥 물에 잠긴 쌀알들이 저희 아래 물새알이라도 감춘 듯 한결같은 표정이다 들여다볼수록 착해지고 싶은 쌀

  
  최씨네 봉제공장이 있는 독립문에서 충청로 뒷길 지나 아현동 비탈길을 올라 어머니 저문 대문을 들어서네, 부은 발등에 물을 끼얹네, 서둘러 밥을 짓네, 우묵한 양은솥이 밀어올린 온난전선, 잎잎이 순정한 어머니의 꽃잎, 더러는 드문드문 밤콩이 놓여 주걱 위의 가난은 혀에 달았지

  
  밥물이 끓는다 눈보라가 끓는다 능선이 솟는다 꽃잎으로 잦혀진다

  
  주걱에 묻은 밥알 떼어 입에 넣다가 울컥 뜨겁다 사는 일이 달그락달그락 밥 차리는 일이다 밥냄새 피워 올리는 번제, 식탁에 둘러앉는 일이다 길 위에 덩굴지는 밥그릇 행렬이다.




  황금빛 망토의 시절일랑 바람에게 던져 주고, 두고 온 낟알들은 세월의 증인으로 남겨 두고, 누군가의 피와 살이 되기 위하여 끓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뽀오얀 쌀알들. 밥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현재이다, 가장 순결한 피와 살이 되었다가 가장 겸허한 오줌똥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그 가운데에서도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은 우리 몸이 다 성장할 때까지를 감당해준 것이기에 더더욱 현재이다. 평생을 지배하니까.
  시인은 어머니가 사용한 나무주걱을 배사공의 노櫓에 비유한다. 하현달처럼 아래가 닳은 이 주걱은 착해 보일 정도로 희고 단정한 쌀알과 세월을 함께 했다. 시인의 어머니에게는 독립문에 있는 공장을 다니시며 아현동 집까지 걸어오신 시절이 있다. 그 때 나는 어렸고, 어머니는 가끔 밤콩을 쌀알에 꽃잎처럼 얹기도 했다.
  이제 그 시절 어머니의 나이가 된 딸은 스스로 지은 밥을 먹으며 속이 울컥 뜨거워진다. 불을 피워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번제(燔祭)라 하는데,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는 일이 마치 번제와 같다고 말하는 시인의 마음에는 지나간 세월이 잘 익은 흰 쌀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을 터이다.

-  유용선 記


조정인 시인. 서울 출생. 1998년 <창작과비평> 작품 발표로 등단. 시집으로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천년의시작, 2004)과 『장미의 내용』(창비, 2011)이 있음. 제2회 토지문학제 시부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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