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지도자를 성직자라 부르고, 그에 따라 가톨릭이나 성공회에는 신부가 있고 개신교에는 목사가 있고 불교에는 스님이 있습니다. 교인은 그렇게 성직자와 평신도로 양분됩니다. 이래서는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참된 평등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어버이로 모심으로써 형제자매가 됩니다. 물론 예를 갖춰 서로를 선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른 사람보다 윗사람으로 대접받고자 하면 그것은 천자보다 윗사람이 되려 하는 것이라 여겨 삼가야 합니다.
예수를 기독교 삼위일체에 입각한 신격화한 존재로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예수가 단성생식으로 태어났다는 믿음은 고대인의 종교 성향이 낳은 설정에 불과하니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무자비하게 처형당해 의학적으로 죽었던 예수의 육체가 무덤에서 회복되어 부활, 승천했다고 믿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교리와 무관하게 인간 예수는 위대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비천했던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먹보, 술꾼이란 욕을 먹을 정도였으니 그가 이끄는 분위기는 무척 유쾌했을 걸로 추측됩니다. 억눌려 살아가는 군중의 채무와 질병과 억울한 처지를 염려했으며 그들이 부당한 죄의식에 눌려 살지 않게 도왔습니다.
특히 피하고자 하면 피할 수 있었음에도 맞아들인 십자가는 그 모든 사랑과 신념의 궁극적 산물이었습니다. 군중을 변호하려 했고 그들의 죄를 ‘할 수 있다면’ 대속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니 그 숭고함을 기념하는 데 굳이 종교적으로 한정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타종교인은 물론이거니와 무신론자와 함께인들 기념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평등한 교회의 예배는 콘서트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