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용선 Dec 12. 2024

구원받기보다 구원하기를 향하여

“교회는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세상, 하느님 없는 세상, 저주 아래 있는 세상, 허망하고 악한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이름을 오용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놀이 대상처럼 여기고, 인간의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그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악한 세상입니다. 교회가 악한 세상과의 마지막 연대에서 탈퇴하여 세상에 대해 적대적인 역할을 자랑하고 있다면, 교회는 단연코 영원히 잃어버린 세상, 적그리스도의 세상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본회퍼의 지적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간판으로 내건 교회일지라도 그의 정신을 머리로 삼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의 적대세력입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지도층이 권세와 탐욕에 정신을 빼앗겼을 때는 그 수장인 교황에게 적그리스도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파와 교단이 많은 시절에는 적그리스도에게 탈취당한 교회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경신년에 와서 전해 듣건대, 서양인들은 天主의 뜻이라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 교당을 세우고는 도를 행한다고 한다. 하여 나는 또한 그것이 그럴까 어찌 그것이 그럴까 의심하였더니” ― 『동경대전』 <포덕문>에서

19세기 한반도에서는 겉으로는 하느님을 내세우면서 행동으로는 부귀와 권세를 탐하는 기독교에 반발한 사람들이 그 정체를 의심하여 서학이라 부르며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렇게 생긴 종교가 동학이지요. 천주 하느님을 섬겨오던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원인이 뭐였겠습니까? 당시 기독교가 예수의 참모습을 감추고 피와 탐욕의 선교를 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은 또 어떻습니까? 예수의 명령을 받아 기쁜 소식을 전한다면서 그의 삶과 가르침은 사문화된 문장으로 남기고, 신격화한 예수를 막대 끝에 꽁꽁 묶어 높이 쳐들고 교세 확장만 꾀하는 영리주의가 팽배합니다. 그런 교회는 자신도 타인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조직의 우두머리는 하느님도 그리스도도 아닐 테니까요. 

이제 우리는 신앙과 신학의 패러다임을 구원받기에서 구원하기로 크게 전환해야 합니다. ‘어떻게 구원받는지’가 중심이 되면 인생만큼이나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고 논쟁과 분열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를 인간으로서든 신의 후계자로서든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구원받기보다 구원하기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와 한몸을 이룬 작은 그리스도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삶은 누구나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시작할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