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慈悲와 인仁 같은 보편적인 미덕은 동서고금 어떤 사회에서든지 환영받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관념인 채로는. 하지만 이것이 실천 계명으로 구체화되면 세상으로부터 차갑게 거부당합니다. 한편, 정의는 주어진 사회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해석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나눔과 베풂은 ‘인간 내면의 율법’인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 실천 덕목입니다.
예수는 부자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모두 나눠주고 나서 자신을 따르라고 했지만,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런 부자는 정말 희귀합니다. 기독교회 자체가 빈궁한 사람들의 안위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자비의 실천 방안으로 ‘베풂’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불교회의 베풂은 석가모니의 바람에는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춘추전국의 제후들은 대체로 공자에게 존경을 표시했지만 그를 재상으로 중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양화 같은 제후는 아예 대놓고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루카 6:20)이라고 한 말은 헬라어 프토쏘(움츠리다, 웅크리다)에서 유래한 프토코스로서 ‘움츠러든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의 헬라어 ‘프토코스 호 프뉴마’는 ‘숨이 움츠러든 사람들’ 또는 ‘숨죽인 채 사는 사람들’이고, 루카복음 6장 20절은 그냥 프토코스 즉 ‘움츠러든 사람들’이라고만 적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산상설교로써 축복한 가난한 사람들은 맥락상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을 비참함 속에 처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공의의 구체적 실천으로써 표현되어야 할 나눔과 베풂의 최우선적인 대상은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극빈, 전쟁, 전염병, 희귀질환, 폭력, 기후위기, 환경오염 등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는 나눔과 베풂이 인간을 돕고 구출하는 활동임과 동시에 비참의 원인을 제거하는 활동이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가 예화 ‘선한 사마리아인’에서 강조했듯이 방기放棄는 죄입니다. 방기란 마땅히 돌보아야 할 것을 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않는 죄를 일컫는 낱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5절에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에서 방기는 아주 유력한 심판 기준으로 소개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부자는 재산을 나누고 베풀어서 타인을 비참한 상황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습니다. 재산이 적은 사람은 시간과 노동을 나누고 베풀어서 타인을 위험으로부터 구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노동을 나누는 것보다 재산을 나누는 것이 더 손쉬워 보이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부자들이 쌓아올린 방기의 죄가 어떤 건축물보다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