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는 말은 기독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한 말은 기독교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가 곧 기독교는 아니니까요. 종교가 이럴진대 하물며 경전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칩니다. 종교인으로서 당연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가 성경입니까? 토라와 예언서들입니까? 아니면 복음서와 사도들의 목회서신을 포함해 통권으로 편집한 소위 정경입니까? 목회서신까지도 성경이라면 사도들은 자신들의 글을 스스로 성경으로 높인 것입니까?
우리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기독교 경전 대부분이 작가 즉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쓰여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문서 대부분이 사실주의가 아닌 상징주의 기법으로 쓰였습니다. 바이블 저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적었다는 생각(축자영감설)은 광신에 불과하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들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적은 것’이라 오류가 전혀 없을 거란 성서의 무오성 주장도 매우 위험합니다.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냈다는 편지 안의 구절을 근거로 듭니다.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이 문장에서 ‘하느님의 감동으로 된 것’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입니다. 데오스(θεός, 신)와 프네오(πνέω; 불다, 숨쉬다)에서 왔으며 하느님의 숨을 받았다는 뜻을 영감, 감동 등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감동과 영감을 받아서 쓴 원고일지라도 잘못된 이해와 불완전을 찾아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쳐야 합니다. 언어의 한계 때문입니다. 같은 낱말, 같은 표현이라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이해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기독교인 가운데에는 바울의 편지를 성경이라 부를 정도로 존중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 가운데에서 받아들일 만한 구절을 택하겠습니다. 다음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폐지됩니다.” (고전 13:8-10)
여기서 제가 폐지된다고 번역한 헬라어 카타르게요(καταργέω)는 쓸모없어지다, 무효로 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언과 언어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경전은 아가페 사랑이 오면 폐지되고 무효가 되고 쓸모없어집니다. 바울 외에 다른 사도들도 같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잘못을 용서해 줍니다.” (베드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요한)
종교와 경전은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떠받들든 인간 예수를 더 중시하든, 우리의 목적은 그가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한 아가페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에는 소모적일 뿐인 교리 논쟁이 너무 많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찬식에 쓰인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도 참으로 많은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화체설, 공재설, 임재설, 기념설, 상징설 등등. 정작 가장 중요한 예수의 말씀은 뒷전입니다. “이것(빵)은 내 몸이다.” “이것(포도주)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예수가 ‘내 몸’이요 ‘내 피’라 말했으니 그의 몸이요 그의 피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요? 중요한 건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닐까요?
예수는 성찬식을 전례의 일부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식사는 항상 무상으로 베푸는 공동식사의 모습을 띠었습니다. 성찬식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스승을 잃을 제자들이 흩어져 방황하지 않고 모여 함께 식사를 나누길 바라고 그 자리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기 바라는 안타까운 사랑. 그러므로 제자들의 모든 공동식사가 성찬식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구원 논쟁은 병적이고 악마적이기까지 합니다. 유난히 ‘구원’이란 주제를 자주 언급하며, 그에 따른 논쟁과 분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종교일원주의나 종교다원주의나 둘 다 종교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대전제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입으로는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종교와 소속 교단을 하느님과 동일시합니다. 그들에게는 기독교가, 특정 교단이 우상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인생은 태어난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따라서 어떤 인생은 믿음의 비중이 크고 어떤 인생은 은총의 비중이 큽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구원 vs. 은총으로 구원’ 대립은 편협한 도식에 불과합니다.
사후세계 논쟁도 멈춰야 합니다. 인생에는 오늘만 존재합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입니다. 지나간 오늘에서 잘 배워야 오늘을 잘살 수 있습니다. 다가올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비하는 오늘은 행복합니다. 예수는 하느님은 죽은 자의 신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타종교의 전생이니 윤회니 하는 관념을 비웃으면서 정작 기독교인 자신들은 사후천국, 사후지옥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며 현생을 낭비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분석신학자로서 저는 교리보다는 예수의 삶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의 삶을 닮은 석가모니, 공자 등 성현들의 삶에서도 배우고자 합니다. 지구 인류의 어떤 종교 문화에도 얽매임 없이 우주 주재자의 장엄한 섭리를 먼저 생각하고자 합니다. 종교와 경전 따위는 분석신학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