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틀이 생각의 한계를 정하기 마련입니다. 고대 히브리인은 우주를 창조한 유일한 신이라는 커다란 틀을 상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을 자기 민족이 독점했다는 심대한 착각에 빠져 선민사상에 젖어 버렸습니다. 우주를 창조한 가장 큰 신을 민족의 수호신으로 삼으려다 신에게 이름도 붙이고 전용 성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신교를 숭배하는 민족들의 신앙 행태와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후손으로 태어났음에도 조상이 짜놓은 틀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첫 번째로 중시한 것은 신명기의 한 구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네페쉬)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신명기 6:5)
이어서 그가 두 번째로 중시한 것은 레위기의 한 구절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레위 19:18)
핵심을 곧바로 끌어왔습니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며 유일신 체통을 스스로 깎아먹는다든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며 소인배처럼 군다든지 따위 다신교 신앙 체계와 다를 바 없는 관념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신을 언급할 때도 조상들이 지어 붙인 이름을 부른다거나 관습에 따른 다른 호칭 대신 ‘아버지’를 선택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스스로를 신격화하던 시대에 ‘신의 아들’은 ‘신의 후계자’와 같은 뜻입니다. 황제의 아들 가운데 황제의 후계자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민중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이끌었습니다. 만약 예수가 하느님의 후계자가 된다면 그를 따르던 군중은 모두 그의 형제자매가 됩니다. 게다가 제자들에게는 ‘친구’(요한 15:15)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창세기 1장), 친구 하느님(에덴동산), 보호자 하느님(노아)은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모세의 하느님보다도 더 원초적인 하느님의 이미지였으니까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우리 모두가 창조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이렇듯 관계의 재설정이 이루어집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같은 종교적 관계도 없어지고, 주인과 종 따위 상하관계도 사라집니다. 그 속에서는 이름과 민족과 성전과 경전에 갇힌 협소한 신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하게 선한 신이 기다립니다.
‘아버지’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은 중요한 의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갈 때, 하느님은 ‘아들의 고통과 함께하는’ 아버지이자 ‘아들과 함께 고통당하는’ 아버지입니다. 잠시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살펴봅시다.
1.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루카 23:34)
2. “내가 진실로 너에게 이른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루카 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보라, 너의 어머니이시다.” (요한복음 19:26~27)
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6, 마크 15:34)
5. “내가 목마르다.” (요한 19:28)
6. “다 이루었다.” (요한 19:30)
7. “아버지, 내 영혼(프뉴마)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 (루카 23:46)
물론 이 일곱 가지 발언은 예수가 실제로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일부만 사실일 수도 있고 심지어 전부 창작 대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체험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는 군중을 변호하고(1언), 죄인을 구하고(2언),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고(3언), ‘절대 고독’(4언)을 체험하고, 갈망하고(5언), 성취하고(제6언), 순응(7언)합니다. 초대 교회가 예수의 죽음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끝으로, 우리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삼위일체 교리 관념을 잠시 내려놓고 예수에게 그가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이 어떤 존재였는지 복음서라 부르는 언행록들을 통해 살펴봅시다.
1. 하느님 말고는 선한 이가 없다. (마크 10:18, 루카 18:19)
2.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마태 5:45)
3. 아무도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4.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마태 6:26)
5.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기도로써 고치는 모습들.
예수가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은 선악의 측면에선 유일하게 선한 존재로서 자연의 섭리를 주도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예수의 하느님은 개인의 소유욕 반대편에 있습니다. 구약에는 개인을 축복해서 부자로 살게 하는 신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수의 하느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소유의 가치만 인정했습니다. 그러한 재물의 운용을 ‘하늘에서 얻을 보물’로 비유했습니다.
“아직도 너에게는 부족한 것이 있다. 너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크 10:21, 마태 19:20, 루카 18:22)”
따라서 개인이 자신의 소유를 하느님의 은혜로 생각하려면 그것을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데 사용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도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작은 쪽문(바늘귀)을 통과하기만큼 힘들다고 한 예수의 설교를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천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