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영웅 캐릭터를 다루는 종교의 경전을 이해하는 가장 바람직하고 정확한 방법은 그것을 서사시, 희곡, 언행록, 서한, 소설 등 각각의 내용과 형식에 걸맞은 문학 장르로 받아들이고 저자들의 집필 의도를 간파하는 것입니다. 바이블처럼 다양한 장르의 여러 작품이 통권으로 편집된 책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어떤 종교이든 교조敎祖가 사망하면 그의 추종자들은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그를 대체할 이미지를 구축합니다. 이때 신성, 영원성 등의 특질이 부과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현상을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종교라는 문화만큼 인간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으니까요. 종교만큼 그 사회의 집단 콤플렉스를 잘 드러내는 것도 없으니까요.
과학이 탐구하는 우주의 근원자와 종교에 등장하는 신들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데, 예수의 신은 뜻밖에 전자에 더 가깝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 때문에 예수 역시 일신교와 다신교 숭배자들처럼 신을 과하게 인격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가 언급한 신에게는 자연섭리의 주재자다운 면모가 있을 뿐입니다. 추수하는 농부 같은 면모라든지 차별 없이 햇볕을 내리는 면모는 자연 섭리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는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권세조차 하느님이 아닌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고 하여 신성모독죄 혐의를 얻기도 했습니다.(마태9:6, 마크2:10, 루카5:24) 안식일에 대한 태도도 종교적 격식에 따르기보다는 그 본질(사람을 위해 존재함)에 따라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심지어 자신을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침묵합니다.
‘우주의 근원’ 또는 ‘우주의 주재’를 모시고 싶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모든 형태의 숭배를 깔끔하게 내다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불가능할 겁니다. 그보다는 우리 삶에 너무나도 자주 등장하는 숭배 현상의 궁극에 누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훨씬 실천하기 수월할 겁니다. 살면서 그 당장은 깨닫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차분히 생각하면 진정으로 감사할 대상이 누구였는지 자신의 욕망을 함부로 섭리로 오해하지는 않았는지 따위가 드러납니다. 그 깨우침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은 배움 즉 ‘바른 앎을 향한 열망’입니다.
바른 앎을 통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열망은 개인의 내면에 거하는 신성입니다. 개인의 신성과 우주의 신성이 서로 만나려면 이러한 열망이 개인에게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때로는 인간의 믿음이 주가 되어, 때로는 신의 은총이 주가 되어, 성사됩니다. 인생이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니 개인의 신성과 우주의 신성이 만나는 양태 또한 다양합니다.
예수가 사망한 뒤에도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계속하여 그의 제자들이 탄생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고 창조된 모든 세계에서 꾸준히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오래도록 그 사실을 부인한 채 오만하고 편협한 종교 선민주의에 빠져 허우적댔습니다. 하느님을 자신들이 독점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종교 일원주의니 종교 다원주의니 하지만,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구원을 보장하는 종교는 없었고 없으며 없을 겁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종교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자연계에, 쉼을 모르는 인간의 마음속에, 인간관계의 정의와 조화를 추구하는 활동 속에,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 안에, 창의적인 예술가의 솜씨 안에, 세계 종교들의 역사 속에서 현존하고 일합니다.”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다니엘 L. 밀리오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