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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Aug 24. 2019

실낙원과 선악과의 상징성

- 생태계와 단절하다

다섯 번째 날에 생물들을 창조하시어 그것들에게 번식하고 번성하라 축복하신 하느님께서는 엿새째에는 그것들을 다스릴 인간을 남과 여로 창조하시고 그들 역시 번식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천지창조(1장)와 아담의 족보(5장) 사이에는 특별한 부부와 그들의 두 아들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짓되 남과 여로 지었다.”(창세기 1:27)와 “그분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기 5:2) 사이에 관점이 전혀 다른 ‘흙으로 빚어 만든 남자의 몸 일부를 떼어 아내를 만들었다’(창세기 2:7~23) 설정의 설화가 끼어든 것입니다. 이 설화를 창작한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셋째 날에 곡식과 과일나무를 창조하셨다'는 기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에게는 가부장제와 1부1처제 확립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창세기 1장에 해당하는 성서 두루마리를 읽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땅에는 아직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5장)

아주 특별한 남녀 이야기를 해설을 곁들여 요약해드리겠습니다.




땅에서 솟은 물이 온 땅을 적시자 하느님께서 땅의 흙(아다마)을 빚으시어 사람(아담)을 만들고 콧속으로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사람이 하느님과 소통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이란 곳에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그곳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돌보다’의 원어 아바드(ābad)는 일하다, 경작하다 등으로 쓰이는 동사로 성서에서는 섬긴다는 뜻으로 널리 쓰입니다. 에덴은 인간이 놀고먹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일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특별한 나무가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나무’로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게 되는 나무였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나무’로 그것을 먹으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대신 죽는 나무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죽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여러 새들을 만드셨는데 사람을 지으실 때는 콧속에 생기를 불어넣기까지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영원성이 있다는 히브리 전통 사상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짐승들과 새들을 사람 앞으로 데려오시자 사람은 그것들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게 당신 보시기에 좋지 않아 그가 잠든 사이에 그의 갈빗대를 하나 취해 짝을 만드셨습니다. 남자의 짝, 곧 여자는 남자를 도왔습니다. 이곳에 쓰인 ‘돕다’의 원어는 에제르(ēzer)로서 하느님이 주체가 된 도움에 한정해 쓰는 낱말입니다. 여자는 남자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대등하게 협조하는 존재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여자를 보고 자기 뼈와 살에서 나온 존재라며 매우 기뻐했고, 남자(이시)인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으므로 새로 지어진 여자를 ‘남자에게 속한 사람’(이샤)이라 불렀습니다. 두 사람은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동산에 사는 짐승 가운데 뱀은 아주 간교했습니다. 뱀은 아주 교묘한 말솜씨로 여자를 유혹해 지식의 나무를 따먹게 합니다.


: 하느님께서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셨냐?

여자: 아니.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 하셨어. 먹으면 우리가 죽게 될 거라 하셨어.

: 아니야. 너네, 그거 먹어도 절대로 안 죽어. 하느님께서 너희가 그거 먹고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착한 것과 나쁜 것을 다 알게 될까 봐 그러신 거야.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당신처럼 똑똑해지는 거 싫어하시거든.


보다시피 화법이 참 교묘합니다. 당연히 여겨오던 것을 회의하게 하여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질문하고 난 뒤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믿고 있는 사실을 부인하고 더 나아가 왜곡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일을 먹으면 하느님이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먹으면 죽을 운명에 처한다는 뜻입니다.

뱀의 화술에 넘어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된 여자의 눈에 ‘지식의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열매는 맛도 맛이거니와 정말 자기들을 하느님처럼 지혜롭게 해 줄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자가 열매를 따서 먹으니 맛도 좋아 결국 남편에게도 권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크리스이나 이 부분을 들어 여자가 먼저 먹고 나서 남편을 유혹했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좋다고 생각한 물건을 배우자에게 권한 행동 어째서 ‘유혹’으로 해석하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쨌건 열매를 먹은 두 사람의 눈과 마음에 이상한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둘은 자기들이 벗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져 무화과나무 이파리를 엮어 생식기를 가렸습니다. 동산을 거니시던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으시자 그들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하느님을 만나는 게 두려워져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립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탓을 돌렸고, 여자는 뱀에게 탓을 돌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뱀의 꼬임에 빠져 사람이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따먹었음을 알고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유혹한 뱀을 저주하시어 배로 기어 다니면서 흙을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남녀의 평등도 어느 정도 무너져버려 여자는 남편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될 거라 예언하십니다. 남자의 노동도 이전과는 달리 참담해져 땀을 흘려 흙을 갈아야만 땅에서 나오는 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출산할 때마다 매우 큰 고통을 겪게 되었고요.

하느님께서는 에덴을 관리할 자격과 능력을 잃어버린 두 사람을 동산 밖으로 내보내시기 전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동산의 입구에는 천사들(케루빔; cherubim)을 두시고 생명의 나무로 가는 쪽에는 움직이는 불칼을 두셨습니다. 두 사람은 지상낙원으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아내인 여자를 ‘하와’라 불렀습니다. ‘하와’라는 이름에는 ‘생명’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므로, 아담은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뜻으로 자기 아내를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하와는 다시 아기를 낳기 시작했습니다.




이 설화는 사람이 죽어 흙으로 가는 이유를 사람이 애초에 흙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의 근본적인 차이도 등장합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다’라는 구절은 인간이 창조주가 몸소 생기를 불어넣으신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과학적으로 봐도 인간의 호흡과 뇌 성장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죠.

앞서 창세기 1장 26절에 등장했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구절의 의미가 이 부분에 와서 확실해집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말은 ‘생기를 불어넣자 생명이 되었다’는 문장을 따라 인간도 창조주 하느님처럼 영적 특성을 갖춘 존재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겉모습이라면 유인원과 원숭이 등이 모두 하느님을 닮은 것이 되니 말이 안 되지요. 훗날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여야 할 것”(요한 4:24)이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의 두 남녀 이야기에는 제가 특별히 주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유혹하는 뱀이나 유혹당하는 인간이나 ‘하느님과 같아짐’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눈이 밝아져서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이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라 믿고 선악과 즉 지식(문명)을 선택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이후로도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죠. 아무래도 이 설화 속의 열매는 아무래도 불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불이야말로 인간을 '하느님처럼 행동하는 동물'로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계기입니다. 불을 사용하지 못했다면 두뇌의 발달도 없었을 테고 선과 악을 분리해 생각하여 종교를 발전시키지도 못했을 테고 농사와 목축으로 문명을 이루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인류가 조물주와 단절된 최초의 원인은 불순종이니 원죄니 같은 종교적 관념으로나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 생태계의 파괴입니다. 아마도 시작은 우연한 대형화재였겠지요. 불의 사용으로 시작된 인류 문명은 농업, 목축, 건축기술 등을 거쳐 속도와 파괴력을 자랑하는 전쟁무기를 끊임없이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그로써 인간이 얻은 위상이라곤 지구와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 이제 그만 사라져주는 편이 좋은 존재가 되었을 뿐이지요.


루카스 크라나흐 그림


원죄니 불순종이니 하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해설에 물든 눈을 깨끗이 씻어낸 뒤에 차분하게 에덴동산 설화를 다시 읽으면, 이 작품이 죽음, 영생, 추방, 단절 등 인류의 중요한 테마들을 골고루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테마들을 따라 실낙원과 선악과의 상징성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 과연 존재할까 의심합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3:1)


2. 죽음을 자연현상이 아닌 어떤 조건에 뒤따르는 현상 즉, 터부의 결과로 인식합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3:3)


3. 영원한 삶에 대해 본격적으로 상상합니다.

“결코 죽지 않으리라. You surely will not die!”(3:4)


4. 영생을 상상할 줄 알게 된 인간은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악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는 생각도 할 줄 알게 된다.(3:5)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 주체가 절대자와 자연이 아닌 자신들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특권인 선과 악이 인간의 판단 영역으로 내려왔습니다.


5. 생태계에 순응하지 않고 인간적인 지혜 즉 문명을 발전시킬 도구를 찾습니다.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3:6)


6.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수치심에 눈을 뜹니다. 지구상에 알몸을 감추려고 숨는 동물은 없습니다. 알몸 수치심은 성적인 수치심이니, 이는 분명히 남녀가 짝을 이루어 ‘배타적인 성관계’를 이룬 혼인 풍습의 정착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고”(3:7)

“알몸이라 드러날까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7. 불행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며 책임을 피하려는 시도를 할 줄 알게 됩니다.(3:12~14) 남자는 여자를 탓하고 여자는 뱀(악마)을 탓합니다. 창세기의 이 부분을 쓴 저자는 히브리 공동체에 가부장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기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한다 함은 공동의 두려움 및 징벌(懲罰) 관념이 생겼음을 뜻하죠. 사실 두려움과 징벌은 하느님께서 바라는 바가 아니라 인간의 오해입니다. 하느님은 열매의 위험성을 사전에 경고하셨을 뿐입니다. 인간은 불순종으로 벌을 받아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징벌을 두려워하게 된 인간은 마침내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인 뱀 즉 악마를 찾아냅니다. 반면,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악마조차) 탓하지 않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지요.


8. 선(옳음)과 악(그름)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견고하게 자리 잡습니다.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3:22)


9. 생태계와 별도로 움직이며 문명을 이루어 고생하며 살게 된 인간은 스스로를 ‘추방된 족속’으로 인식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3:23)


10. 인간이 죽지 않는 존재로 되돌아갈 수 없는 까닭은 하느님이 그 길을 차단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은 동산 동쪽에 그룹 천사들을 세우시고 둘레에는 불타오르는 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3:24)


찾아보면 더 있을 것 같지만 이상 열 가지로 멈추겠습니다.

사람이 이미 먹으면 ‘반드시 죽는’ 열매를 먹었는데 이어 ‘반드시 영원히 사는’ 열매를 먹으면 아주 심각한 모순이 발생합니다. 이 모순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려면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부활 사상은 성서의 흐름을 볼 때 필연입니다. 참고로, 사람이 죽고 나서 그 영혼이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사상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지면을 활용하겠습니다.

언뜻 유치해 보이는 이 짧은 설화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고 날카롭고 체계적인 통찰이 들어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불순종이 신과 인간 사이를 끊어 놓았다는 인식까지는 가능하지만, 이 불행한 사건을 범죄와 타락으로 적용시키면 분명한 비약이 됩니다. 실제로 성서의 어느 부분에는 ‘죄는 여자에게서 시작되고 여자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는다.(집회서 25:24)’는 불공평한 인식이 문자로 콱 박혀 있습니다. 비극입니다.

성서가 묘사한 인류 최초의 윤리적 타락은 에덴동산 추방 뒤에 벌어진 카인의 살인입니다. 다음에는 또 하나의 설화 '아벨과 카인 형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 이 시리즈는 전자책 <성경을 읽었습니까?>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digital.kyobobook.co.kr/digital/ebook/ebookDetail.ink?&barcode=4801188123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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