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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Aug 26. 2019

약속의 아들, 이사악

- 창세기 21장 1절부터 25장 20절까지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한 들판의 성읍들이 재앙으로 멸망하자 아브라함은 이제껏 살던 헤브론을 떠나 유다의 남쪽으로 길게 뻗은 팔레스타인 사막지역(네겝)으로 이사합니다. 이스마엘을 임신한 하갈이 천사를 만난 바로 그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지중해 가까이 있는 그랄에 머물기로 합니다. 


하느님의 약속대로 사라가 임신하여 마침내 아들을 낳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로 그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분부대로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짓습니다. 사라는 “주님께서 내게 웃음을 가져다 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기쁘게 웃어 주겠지. 사라가 제 자식에게 젖을 먹일 날이 오리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감히 말할 수 있었던가. 하지만 나는 지금 늙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처럼 아들을 낳았다.” 하며 기뻐했습니다.

이삭이 자라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첩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자기가 낳은 이삭을 놀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불쾌해진 사라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요.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눠가질 수는 없어요.”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스마엘도 그에게는 귀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었으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슬퍼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시며, 이스마엘도 나라를 이룩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빵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에게 챙겨주고는 아기와 함께 내보냈습니다. 길을 나선 하갈은 광야에서 헤매다 결국 물과 음식이 떨어집니다. 하갈은 아기를 덤불 그늘 아래로 내던지듯 놓아두고는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어미로서 제 자식이 죽어가는 꼴을 어찌 눈앞에 두고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때 하느님 천사의 음성이 하갈에게 닿았습니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이스마엘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네 손으로 꼭 붙들어 주어라. 그로부터 큰 민족이 생겨날 것이다.” 기운을 차린 하갈의 눈앞에 샘이 있었습니다. 하갈은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 와 아이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이집트까지 가지 않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라 힘도 세고 활도 아주 잘 쏘는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하갈은 자기 고향인 이집트 땅에서 며느릿감을 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 지역인 그랄에 정착해 사는 동안 이삭 또한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백 살에 얻은 외아들이니 오죽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아들을 보며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후손을 상상했고, 아들에게도 자신이 지닌 경건한 신앙을 교육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제가 여기 있나이다.” 

“너의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그곳에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는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이 점에 있어 아브라함의 신앙도 수시로 도전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식의 목숨까지도 우리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그러니 우리 신앙이 너보다 더 위대하다. 아브라함, 너의 신앙은 너무 뜨뜻미지근한 게 아니냐?’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제껏 한 번도 아브라함이나 그의 종들에게 그 비슷한 요구조차 한 적이 없으셨니다. 아브라함의 당혹스러움과 슬픔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한 마디의 말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하인 둘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사용할 장작을 마련한 뒤 길을 떠납니다. 사흘째 되던 날 목적지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겐 산의 입구에서 기다리라 명하고 이삭의 어깨에 장작을 지우고 본인 손에는 불과 칼을 들었습니다. 둘이 함께 걷는데 이삭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대로라면 번제에는 양이나 송아지 따위가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왜 없지? 

“아버지!” 

“왜 그러느냐?”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에 쓰일 양은 어디에 있나요?” 

이삭의 질문을 받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산을 오르고 있었을지. 아들을 최대한 고통 없이 단칼에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이삭이 죽고 난 뒤에 하느님께서 다시 살려내시진 않을까, 사라가 다시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새롭게 아들을 낳은들 그가 이삭은 아니지 않은가 등등. 아브라함의 머릿속은 천 갈래 만 갈래 번민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놀랍습니다.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어떤 역본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번제에 쓰일 양으로 주실 거란다.”라 쓰여 있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삭을 묶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삭이 반항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성서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그 소리에 손을 멈추고 “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으니 네가 하느님을 얼마나 경외하는 줄 잘 알겠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숫양 한 마리가 덤불에 뿔이 걸린 채 버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끌어 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의 음성을 통해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며 장차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장차 세상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훗날 기독교인들이 재해석합니다. 복 중에 가장 큰 복 그리스도.

이 사건은 아브라함에게나 이삭에게나 결코 잊지 못할 큰 사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숭앙하는 하느님께서 우상들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거듭 확인했고, 이삭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달았겠지요. 두 사람의 신앙은 그 뒤로 더욱 단단해집니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어 아브라함의 광신적 행위라 비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요.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좋은 것만을 예비해온 존재였습니다. 물론 성서에는 단 한 낱말 단 한 줄의 문장도 그 당시 아브라함의 심경을 묘사한 부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기도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절대선(絶對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이 사건은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우상들 앞에서 행해지던 이교도의 영아살해 행위와 유대교의 수준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사라는 일백스물일곱 살에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있는 넓은 들 막벨라를 사서 그 안에 있는 동굴에 아내를 안장했습니다. 사라가 죽었을 당시에도 이삭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채였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은 정실부인인 밀가를 통해선 아들을 여덟이나 낳았고 첩 르우마를 통해서도 아들을 넷 낳았다. 손자손녀도 보았고요.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 곧 자기 며느리 될 여인을 가나안 족속이 아닌 자기 친족 가운데에서 얻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기 종 가운데 가장 믿음직스러운 엘리에셀에게 낙타 열 마리와 하인들과 갖은 선물들을 함께 실려 동생 나홀의 식구들이 모여 사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북부로 길을 떠나보냈습니다. 

일행은 몇 날 며칠 언덕과 계곡과 강과 사막을 지나 마침내 나홀의 성읍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성읍 밖에 있는 우물가에 낙타를 세운 때는 저녁으로 성에 있는 여자들이 물을 길러 나오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에셀은 자기 주인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여기 오는 젊은 여인들 가운데 내가 물을 달라고 할 때 나에게는 물론 낙타에게까지 물을 먹여주는 여인이 있어 그가 곧 주님의 종인 이삭 도련님의 배필이 되기를 비나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제 주인 아브라함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제가 알겠나이다.” 

엘리에셀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젊고 예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엘리에셀이 물을 청하자 젊은 여인은 그에게 물을 주는 것은 물론 낙타에게도 물을 먹였습니다. 열 마리나 되는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면 매우 번거로웠을 텐데도 여인의 얼굴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라곤 없었습니다. 엘리에셀이 여인에게 사례하면서 물으니 여인은 나홀의 손녀 리브가였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직감한 그는 여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숙소를 제공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리브가는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 오빠인 라반에게 이 모든 일을 말했습니다. 라반은 몸소 일행이 있는 곳으로 마중 나와 일행을 집으로 데리고 가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엘리에셀은 대접받은 음식을 입에 대기 전 자초지종을 모두 말했고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과 오빠 라반으로부터 리브가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엘리에셀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당시 풍습에 따라 결혼 기념물들을 신부될 리브가와 그 식구들에게 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음식을 먹고 거기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에셀은 리브가와 그녀의 유모와 몸종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일행이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이삭은 혼자서 들로 나와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녁마다 그곳에서 묵상을 하곤 했습니다. 이삭이 눈을 들어 보니 낙타를 탄 일행이 오고 있었습니다. 리브가는 일행을 맞으러 오는 이삭을 보자 얼른 낙타에 내려 그가 누구인지 묻고 그가 바로 신랑이 될 이삭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얼른 머리에 쓰는 천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엘리에셀은 이삭에게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들려주었고, 이삭은 기쁜 마음으로 리브가를 자기 어머니가 생전에 사용하던 천막으로 데리고 가서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매우 어여삐 여기었고 어머니를 잃은 그의 마음은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두라라는 이름의 첩을 얻었는데, 그 여자로부터 아들이 다섯 명이나 태어납니다. 편집 순서 때문에 첩을 들인 사건이 그의 아내가 죽고 아들이 결혼한 뒤처럼 보이지만, 다섯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볼 때 본처인 사라의 생전에 생긴 일로 보는 쪽이 더 타당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두라로부터 태어난 자손들에게 재산을 떼어주고 그들을 모두 동쪽 땅으로 내보냈습니다. 일백일흔다섯 살에 죽은 아브라함의 장례는 이스마엘과 이삭이 함께 치릅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어머니 사라가 묻힌 동굴에 장사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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