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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Aug 29. 2019

정복왕 여호수아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입니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조상(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던 땅을 되찾은 전쟁 영웅이지만, 당시 가나안 지역에 정착해 있던 국가들에게는 자신들의 땅을 빼앗은 약탈자입니다. 땅을 소유한 적 없는 히브리 계층에게는 그들의 경전이 주장하는 '하느님과의 계약'이 소유권의 근거였습니다. 구약성서의 가나안은 오늘날 우리가 팔레스타인이라 부르는 지역입니다. 지리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잇고 있으며, 당시에도 이집트 문명권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사이에서 양쪽 문명을 고루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수원지(水源池)라야 북쪽의 갈릴래아 호수, 요르단강 그리고 남쪽의 사해가 고작인 가나안은 비록 척박한 땅이었으나 양대 문명의 영향으로 도시문명(성읍국가들)을 이루며 살고 있었으니 광야를 지나온 히브리 집단에 비할 때 여러모로 화려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강의 동쪽 길르앗 땅에서 살기로 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을 제외한 아홉 지파는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에서 차츰차츰 이 지역을 점령합니다. 그러니 당시 가나안 사람들 입장에서는 여호수아서란 이스라엘 공동체가 심판과 정복이란 명목으로 자신들에게 행한 살육과 약탈의 기록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종교에서 ‘군주는 신으로부터 토지를 위임받은 존재’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왕실 재정의 창고 역할을 수행하며 권력을 공유했습니다. 토지 소유는 군주가 하사함으로써 상류 계층에게만 이루어졌고, 농민은 토지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점유자였습니다. 여호수아가 활약하던 당시의 가나안 지역은 이집트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행정구역은 아니었지만 이 지역의 성읍국가 군주들은 이집트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군주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성읍 주변 촌락들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했고, 촌락은 그 대가로 생산물과 노동력을 제공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제사를 맡은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않았으며 각 지파에 고루 퍼져 거주함으로써 신앙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레위 지파는 각 지파에서 주는 십일조(민수기 18:20-32)로 생계를 이었습니다. 이렇게 걷힌 십일조는 레위 지파 말고도 고아, 과부, 나그네 등을 위해 쓰였지요. ‘땅을 가질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들’이 연합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땅을 소유 또는 점유해온 자들의 공동체에 싸움을 걸어 영민한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땅을 정복해나갔습니다. “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의 명령을 받은 우리가 그 땅을 공평하게 나눠 관리하며 살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던 길갈이란 곳에서 멀지 않은 요단강 건너에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여리고 성읍이 있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까이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한편 여호수아는 장수들에게 사흘 뒤에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것임을 공표했습니다. 여리고 정복은 그에 앞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에 보냈습니다.

  정탐꾼 두 사람이 들어간 집에는 라합이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라합은 창녀였고 여리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이 라합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목격한 다른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가서 보고하자 왕은 장군들을 라합의 집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라합의 도움을 받아 지붕 위 짚단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장군들은 성문을 잠가 정탐꾼들이 도망갈 수 없게 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떨고 있으므로 하느님께서 함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 이 부분은 사실 허술한 과장입니다. 정말로 침입을 두려워했으면 성문이 그토록 허술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백성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게 위한 과장은 여호수아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치러 올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켜달라는 약속을 정탐꾼들에게서 얻어내고 창문에 밧줄을 매달아 그들이 성벽 아래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의 도움을 받아 사흘 동안 산에 숨어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는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동녘이 밝아오고, 마지막 준비를 마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수아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대열의 맨 앞에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그 뒤로는 성막 조각들을 멘 레위 지파 사람들이, 그 뒤는 나머지 백성이 따라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에 도착했을 때 강은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건널만한 곳이 없자 그들은 근처에서 천막을 치고 홍수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또 사흘이 흘렀습니다. 여호수아는 “내일 하느님께서 신묘한 일을 일으키실 것이다”는 말로 백성들을 고무시켰습니다.

  다음날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법궤를 메고 앞장 설 것을 명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의 물을 멈추게 하실 것이라 미리 일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머릿속에는 모세의 영도 아래 홍해를 걸어서 이집트를 벗어났다던 지난 세대의 역사가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순순히 지도자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제사장들이 물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물이 흘러넘치기를 멈추고 꼿꼿이 서며 마른 땅을 드러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지파마다 강 한가운데 있는 돌을 하나씩 가지고 가라고 명했습니다. 훗날 후손들에게 이 날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맨 끝에 있던 백성의 발이 건너편에 닿자 강물이 다시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이 여리고는 물론 가나안 전역에 퍼져 그곳 사람들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백성을 무사히 이끌고 강을 건넌 여호수아는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젊은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때부터 자기들이 머문 이 평야지대를 ‘이집트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으로 길갈이라 불렀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지방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하느님의 사자를 만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너희 모든 군인들은 엿새 동안 날마다 이 성을 한 바퀴씩 돌아라. 일곱 번째 날에는 이 성을 일곱 번 돈 다음 사제들이 나팔을 불고 이어 온 백성은 다 같이 힘껏 고함을 질러라. 그러면 성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때 쳐들어가라.”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명령대로 했고, 일곱째 날에 실제로 성벽이 무너져 그들은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은 정탐을 도운 창녀 라합과 그의 가문과 그에게 딸린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군대는 성은 통째로 남김없이 불로 태웠고 사람은 물론 가축까지 모조리 죽였습니다. 금과 은, 동제품과 철제품을 금고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욕심을 품고 전리품을 몰래 감추었습니다.

아간의 죽음

  여리고 성에 이어 이스라엘은 작은 성읍 아이를 침공했으나 이번에는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어쩐 일인지 군대의 사기가 떨어진 탓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패배의 원인을 찾던 중 아간이란 사람이 여리고 승전 제물 일부를 훔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패배의 원인이 그의 부정이라 여기고 그와 그의 식솔과 가축을 아골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쌓힌 돌무더기가 무덤을 대신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성읍 아이를 공격하니 이번에는 수월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발 산에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낸 후 모세의 법을 백성들 앞에서 낭독했습니다. 아간이 저지른 일은 상징성이 매우 큰 사건입니다. 사유재산이란 광야 시절부터 형성되어온 평등한 분배 원칙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탈선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지파의 재산이 다른 지파로 건너가는 것(신명 19:14)은 물론 이웃집 땅의 경계선을 함부로 옮기면 저주(신명 27:17)를 받을 정도로 엄격합니다. [*신약성서의 ‘아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 이야기’(사도행전 5:1~11)와 비교]

  연승을 거둔 여호수아는 어느 날 백성들과 언약을 세웁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느님만을 섬기고 이방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정복과 살육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가 바로 우상 타파입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방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는 증거로 세겜에 있는 성소의 상수리나무 아래 커다란 돌을 두라고 명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110세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묻힌 곳은 가아스 산 북쪽 에브라임 산지 담낫세라는 곳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겨레의 지도자로서 활약했지만 왕으로 군림하지도 사유재산을 축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 가져온 조상 요셉의 유해도 세겜에 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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