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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Aug 30. 2019

이스라엘의 대분열

열왕기, 역대기 

  다윗이 늙어 몸이 식자 신하들은 수넴 지역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 아비삭을 데려와 왕과 함께 자게 했습니다. 수넴은 오늘날의 술람(Sulam)으로 추정됩니다. 늙은 왕은 아비삭과 성관계를 맺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여러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즈르엘 여자 아히노암에게서 맏아들 암논을, 가르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에게서 둘째 아들 길랍을, 그술 왕 탈매의 딸 마아가에게서 셋째 아들 압살롬을, 하낏에게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를, 아비탈에게서 다섯째 아들 스바티야를, 에글라에게서 여섯째 아들 이드르암을, 부하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에게선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과 사울 가문의 세바에 이어 이번에는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임금의 자리를 탐했습니다. 군대대장인 요압과 대제사장인 아비아달 등 거물들이 그를 지지했고, 백성의 지지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측근 가운데 예언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과 브나야, 레이 등 솔로몬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잔치에 불렀습니다. 이 소식이 예언자 나단과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거쳐 다윗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밧세바를 통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서둘러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예언자 나단 그리고 브나야 등이 솔로몬을 다윗 임금의 노새에 태워 기혼이란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사독은 그곳에서 기름 담은 뿔을 천막에서 가져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에 이어 '기름 부은 자' 즉 메시야의 직을 계승합니다. 그러고 나서 나팔을 부니, 온 백성이 피리를 불고 땅이 갈라질 정도로 환호했습니다. 이 소식이 아도니야와 그 잔치에 간 사람들에게 닿자 모두들 두려워 떨었습니다. 손님들은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고 아도니야는 성막으로 달려가 제단의 뿔을 움켜잡았습니다. 제단의 뿔이란 제단의 네 모퉁이에 튀어나온 돌기 부위를 일컫습니다. 이것을 붙잡는 행위는 하느님의 은혜와 보호를 호소함을 뜻합니다. 아도니야는 일단 목숨을 건지지만 권력의 추는 아도니야에게서 솔로몬으로 완전히 넘어갑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하면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처단해야 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사람들을 알려주었습니다. 처단해야 할 사람 중에는 다윗 자신의 권력 쟁취에는 큰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은 아도니야를 지지하여 모만에 가담할 위험이 있는 요압이 있었고, 다윗 권력의 정당성을 의심해 자신을 저주(삼하 16:7, 8)한 시므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친척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자신의 성에 묻혔습니다. 40년의 재임 기간 중 헤브론의 유다 임금 시절이 7년 조금 넘고 예루살렘의 통합 왕국의 왕 시절이 약 33년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대외적으로 버젓한 독립국가가 된 때가 바로 이 다윗의 통치 시절입니다. 솔로몬의 왕권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숙청을 감행합니다. 형 아도니야는 그가 다윗의 동녀 아비삭을 아내로 청했다는 걸 구실로 삼아 죽이고, 부친이 지목한 요압, 시므이 등도 숙청합니다. 

  어느 날 솔로몬은 꿈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분별력 있는 마음을 청했습니다. 사실 성서에는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일화라곤 창녀 두 사람 중 진짜 어머니를 골라낸 재판 하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과 관련된 일화는 <솔로몬 연대기>란 책에 있으며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숱한 잠언이 남아서 지금도 구약성경의 한 부분으로 전해집니다. 성서를 직접 읽어보면, 그 안에 드러난 솔로몬은 지혜롭기는커녕 재위 기간 내내 성전 건축으로 민중을 괴롭히고 이방국가의 여자들과 결혼하여 그에 따라 들어온 이방신들을 숱하게 받아들인 어리석은 군주입니다. 잠언을 비롯하여 '지혜로운 임금 솔로몬'이란 이미지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결속된 유대인들이 2대로 끝난 절대왕조 전성기를 기리고자 행한 미화 작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상 숭배라면 치를 떠는 유대인이 솔로몬에게만 관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솔로몬을 찾아온 시바 여왕

  솔로몬은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자기 집과 하느님의 성전과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성벽을 다 짓기까지 아내를 다윗 성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는 기브온의 신당을 비롯한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웠습니다.

  솔로몬은 북쪽 이스라엘에는 열두 지방관을 두어 임금과 왕실에 양식을 대도록 했습니다. 한 사람이 한 해에 한 달씩 양식을 대게 했습니다. 유다 땅을 맡은 지방관을 따로 있었으며, 임금 아래로 사제, 서기관, 역사 기록관 군대 지휘관, 궁내 대신, 부역 감독 등이 있었습니다. 예언자 나단의 아들 아자르야가 지방관들을 관리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친 다윗의 유지를 받들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유지를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다윗의 오해를 승계했다고 봐야 정확하겠습니다. 다윗이 하느님을 위해 지으려던 집은 성전이었지만, 하느님이 말씀하신 집은 가문이니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히브리 민족의 전통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솔로몬은 우주의 창조주를 다른 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성전에 귀속된 신’으로 취급해버린 것입니다. 

  모리아 산꼭대기에 화려한 성전이 우뚝 서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성전을 둘러싼 커다란 뜰에는 이스라엘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헌당식에 온 백성이 모여들었습니다. 임금은 구리 제단에 많은 제물을 바쳤습니다. 시온 산에 있던 법궤도 갖고 와 대제사장만 드나드는 방에 두었습니다. 모세 시절의 성막에 있던 물건도 성전 안에 두었습니다. 그날 구름이 성전 안을 가득 메우자 솔로몬과 백성은 이를 하느님께서 봉헌을 받아들이시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솔로몬은 먼 훗날까지도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될 유명한 기도를 하느님께 바쳤습니다.(열왕기상 8:22~53)

  성전 건축이 끝난 어느 날 하느님이 솔로몬의 꿈속에서 말씀하셨다. 

  “네가 내 뜻을 따라 율법을 지키고 계명대로 산다면 나 역시 너와 네 후손을 축복하겠다. 하지만 너와 네 후손이 나와 나의 계명을 멀리하고 다른 신을 섬긴다면 네가 지은 이 집을 나 역시 멸시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백성은 뭇 민족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이곳은 폐허가 될 것이다.”

  솔로몬은 40년 통치 기간에 하느님의 성전 외에 자신의 궁전과 왕비의 궁전 등 여러 가지 건설 사업을 벌이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기타 족속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이집트 왕비 외에도 여러 외국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는데, 그 여자들이 들여온 이방 종교가 기존의 신앙과 뒤섞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왕정 체제를 옹호하는 바알 신앙이 야훼 신앙에 덧씌워진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빚은 갈등은 그의 사후 왕국이 크게 분열하는 원인이 되고 분열 뒤에도 꾸준히 문제를 일으킵니다. 

  솔로몬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으나, 새로운 왕은 강제노역과 무거운 세금에 반대하는 민중의 부르짖음을 묵살했습니다. 결국 유다지파만이 르호보암을 임금으로 인정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파는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을 임금으로 세우고 세겜을 새로운 수도로 삼아 독립해버렸습니다. 왕권 중심의 남쪽 유다와 전통신앙 기반의 북쪽 이스라엘로 양분되고 만 것입니다. 열왕기와 남북국시대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이스라엘, 에브라임 등은 이 시절 유다와 맞선 북쪽 이스라엘을 일컫습니다. 

  그 후로도 유다에서는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세습합니다. 채찍을 때릴지언정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다윗 왕조에 순종하는 시오니즘 전통이 됩니다. 반면, 나머지 지파로 형성된 이스라엘은 왕조가 아홉 번이나 바뀌고 임금도 열아홉 번 난립합니다. 남북 왕조 모두 불평등한 물질적 기반을 토대로 형성된 터라 정치적으로 안정된 유다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스라엘이나 당시 선각자들의 눈에는 부정적으로 비쳤습니다. 선각자들은 억눌려 신음하는 약자를 대변해 꾸준히 부르짖었습니다.

  한편, 여로보암은 다윗 왕가가 두려웠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미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 모습에 위기를 느낀 여로보암은 그에 대항할 새로운 성전을 베델과 단에 세웁니다. 이로써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장소에 매이지 않는 하느님을 숭배하며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전통’을 벗어나 버립니다. 특히 베델과 단에 마련한 성전에는 금으로 만든 송아지 신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중심의 유다 사람들에게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종교에서는 자신들의 신을 금송아지 상에 새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참고로, 예루살렘 성전 법궤의 덮개에는 거룹 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으로선 ‘형체가 없는’ 하느님의 발등상만 세워 놓은 셈이니 억울한 면도 있습니다. 더구나 백성들은 단 성전의 금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열왕기 12:30) 이 시기부터 예루살렘이 전통의 중앙 성소이고 나머지는 우상숭배와 타협한 지방성소라는 인식이 백성들 사이에 깊게 뿌리를 내립니다. 

  남북 왕조는 대를 거듭할수록 혈통의식과 지역감정과 분단 이데올로기로 대립합니다. 북왕국의 아합 왕은 왕비 이세벨을 따라 바알신을 숭배하고 이세벨은 하느님의 선지자들을 학살하기까지 합니다. 이때 아합과 이세벨을 벌한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북왕국은 아시리아(B.C.722)에게 남왕국은 바빌론 (B.C.586)에게 각각 멸망하고 맙니다. 멸망한 뒤에도 둘 사이에 놓인 적개심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에도 유다 지역민들이 사마리아 지방을 멸시하고 상종도 하지 않는 지역적 편견을 보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러한 편견을 뿌리로 삼아 이방인 전체에 대한 배타적 멸시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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