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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Aug 30. 2019

욥기

수준 높고 장엄한 시극

  인간이 신보다 숭고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욥기만큼 신학자들을 괴롭히는 성서도 달리 없을 니다. 시극(詩劇)인 욥기의 창작 연대는 남쪽 유대 왕국마저 멸망한 기원전 6세기 이후로 추정됩니다. 나라를 잃고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히브리 후예들이 품었을 “의롭고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 신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에 욥기는 답변은 되지 못했을지 몰라도 크나큰 위안이 되어주었을 겁니다. 욥은 당연히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훗날 에스겔서와 신약성서에도 인용되었을 만큼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우스라는 곳에 아주 경건하고 정직하고 신중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욥. 사탄은 하느님의 자랑거리인 이 사람을 이용하여 하느님께 도전하기로 합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가진 것을 몽땅 빼앗아보십시오. 그럼 당장에 하느님을 저주할걸요?”

  하느님은 이에 발끈하여 사탄의 내기에 응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이 마치 오래 전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은 남녀처럼 경솔하고 어수룩하기 그지없습니다.)

  “좋다. 너한테 욥이 가진 모든 것을 맡기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

  사탄은 한시적으로 하느님의 대리자가 되어 욥의 종들을 죽게 하고 재산을 모두 없애고 심지어 그의 아들과 딸들까지 죽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참담한 상황에 놓여서도 욥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나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가는 법이다. 주신 분이 거두어 가시는데 사람인 내가 뭐라 항의할 것인가."

  이리하여 1차 내기는 하느님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내기에 진 사탄의 오기에 불을 지르는 하느님.

  “봐라. 네놈 말대로 해 보았지만 욥은 여전히 나를 원망하지 않지 않느냐?”

  옳다구나 걸렸구나 싶은 사탄이 의기양양해 하는 하느님께 두 번째 내기를 제안합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면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버립니다. 그러니 이번엔 그의 뼈와 살을 치십시오. 이번엔 반드시 하느님을 저주할 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시 그를 너한테 맡겨 보겠다. 다만, 목숨은 건드리지 마라.”

  사탄이 욥의 전신에 악성종기가 나게 하자 욥은 옹기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으며 탄식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욥은 이렇게 말하며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린 복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재앙이라고 해서 받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이때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재앙을 당한 그를 찾아옵니다. 세 사람은 욥의 재앙이 욥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위선적이기 그지없는 훈계를 잔뜩 늘어놓습니다.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성서의 말씀이랍시고 사무실에 이런 문구를 곧잘 적어 놓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너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하지만  말은 욥이 한 이 아니라 그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인 빌닷이 힐난에 앞서 잘난 척하며 한 말입니다. 혹시 갖고 있었다면 부끄러운 줄 알고 치우시길.

  욥 또한 자기가 당하는 재앙이 자기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욥은 이전에도 늘 '혹시 내가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나?' 생각하곤 하던 경건하고 신중하고 선량한 사람입니다. 억울할 따름인 욥은 끝끝내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다만 억울한 심경에 불평을 늘어놓을 뿐.

  “어찌하여 저를 이리 괴롭히십니까? 차라리 저를 죽이심이 낫겠습니다, 하느님.”

  한편 욥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온갖 잘난 척을 해대는 세 친구에게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는 언제까지 헛된 소리를 계속할 작정이냐? 도무지 위로가 되지 않는구나. 하느님은 반드시 내게 귀를 기울여주실 것이다.”

  그 자리에는 그때까지 묵묵히 세 친구와 욥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리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후는 화가 났습니다. 당당하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욥의 모습이나 그에게 변변한 비판도 위로도 하지 못하는 세 친구의 모습 모두 그가 보기엔 옳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말의 취지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당신 말에 한마디 답변도 않으신다고 해서 어떻게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필경 무슨 까닭이 있어 이런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욥 어르신은 본인이 모르실 뿐 마땅히 받으셔야 할 형벌을 받으신 겁니다. 그러니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시니 참고 기다리십시오.”

  엘리후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위대함을 한껏 과시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꾸짖을 참이냐? 어디 나처럼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 보아라. 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 땅에 묻어 보아라. 그들의 얼굴을 천으로 감아 무덤에 뉘어 보아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도 너의 승리를 인정하겠다.”

  욥이 마침내 대답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하였습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였습니다.”

  욥은 본인의 잘못은 물론 잘난 체하며 훈계를 늘어놓던 친구들의 잘못까지 용서해달라고 빌며 하느님께 제사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욥을 축복하시어 그의 재산을 두 배로 불려주시며 그가 잃은 아들과 딸과 같은 수의 자녀(아들 일곱과 딸 셋)를 주십니다. 욥은 아들과 딸에게 똑같이 유산을 물려줍니다. 욥은 백사십 세까지 살며 손자 4대를 보았습니다.




  욥의 결론은 다른 성서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선하고 의로운 자에게 복을 준다는 사상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섭리에 대한 절대적인 순응.

  “나는 확실히 안다. 나를 변호하실 구원자가 살아 계시니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내 살갗이 썩어 뭉그러진 뒤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욥기 19:2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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