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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Aug 31. 2019

예레미아

눈물의 예언자

  기원전 605년, 이집트는 바빌론과의 전쟁에서 대패합니다. 바빌론에 저항하던 여호야킴이 기원전 597년 급작스레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하지만 바빌론은 여호야긴이 등극한 지 3개월 만에 그를 자기 나라로 끌고 가고 시드키야를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 시드키야의 어머니는 이집트로 끌려간 여호아아스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바빌론이 유다 지역 대부분을 정복하고 예루살렘마저 위협할 때, 시드키야는 율법의 면제년(신명 15:12, 13)을 근거로 한 일종의 노예해방령을 선포했습니다. 이 선포는 송아지를 반으로 쪼개는 엄숙한 의식 아래에서 진행되었고, 고위직과 백성들은 처음에는 이에 순종하였지만 얼마 안 되어 자신들의 노예였던 사람들을 다시 끌어와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에 격분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진노가 내려 바빌론에게 멸망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그는 활동을 시작했던 요시야 시절에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았지만 여호야킴 시절부터는 유다의 고관들과 성전 예언자들과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성난 백성들이 그를 진흙으로 가득한 우물에 던져 넣어 왕이 수하를 시켜 꺼낸 적도 있습니다. 지방의 원로들은 그를 보호하려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드키야 왕에게 바빌론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지만 왕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이 아닌 항복을 주장했다는 점이 의아해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 바빌론에 반대하던 세력은 여호야킴의 잔당으로 애국 또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 승산이 전혀 없는 대외정책을 추진하려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예레미야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무너진 사회정의를 바로세울 하느님의 대리자 곧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다윗’이라는 상징을 두고 의견이 크게 둘로 갈라졌습니다. 성전 예언자들은 왕권강화를 내세웠고 예레미야는 정의로운 왕의 출현을 내세운 것입니다. 

  시드키야 제9년 열째 달에 바벨론의 왕과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시드키야의 제11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결국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빌론은 그달리아를 이곳의 총독으로 세워 자치정부를 실시하게 했고, 예레미야는 이 자치정부에 참여했습니다. 그달리아는 사반의 손자요 아히캄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반과 아히캄은 요시야 개혁 당시에 주체가 되었던 사람들로서 여호야킴 시절 예레미야를 후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달리아 정부를 후원하며 정의와 평등이 구현된 사회를 꿈꾸었으나 왕의 종친 출신인 군부지도자 이스마엘과 그의 추종세력의 반란으로 좌절되고 맙니다. 또한 유다의 백성은 이스마엘을 지지하지 않고 이집트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는 그가 ‘애가(Lamentations)’의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잃은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의 정복자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성전을 파괴한 사건(기원전 587~586년)을 애도했습니다. 나라가 그 꼴이 된 근본원인은 거짓예언자들과 탐욕스러운 사제들에게 있다고 애가의 지은이는 노래합니다. 또한 죄를 지은 조상들은 간 데 없는데 그 벌은 후손인 우리가 떠맡게 되었다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가의 최종적인 주제는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면 우리가 다시금 옛날처럼 당신께로 돌아갈 수 있겠나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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