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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다툼에 생긴 이름, '부부싸움'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 톨스토이

by 펭귄 박

1.

“… 너는 두 사람의 다투는 소리와 달래는 소리, 낮은 웃음소리를 점점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문장이다. 소설 초반에 정대와 정미 누나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작가는 그 두 등장인물이 서로 다투는 장면을 이처럼 표현하였다.


사랑하는 사이에 다툼이 불가피하다면 그 다툼은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소설 속 그들은 둘 다 5.18의 희생자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다. 이 시대에 5.18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세상 곳곳의 전쟁과 우리나라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보고 있노라면 이 시대의 평화도 결국 불안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이에 싸우며 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다.


2.

연애하면서 싸우던 커플이 부부가 되었다고 마법처럼 싸움을 멈출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와이프의 부부싸움도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야겠다.


우리의 싸움은 대부분 작은 오해와 옹졸한 마음, 거기에 쓸데없는 자존심이 더해져서 시작된다. 이런 싸움은 우습게도 나중에는 토라진 감정만 남고 애초에 왜 싸우기 시작했는지 그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도 많다. 얼마 전에도 우리는 별 것 아닌 일로 다투었다. 이번 부부싸움의 표면적인 이유는 ‘분리수거’였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주 1회 쓰레기를 분리수거한다. 그래서 우리는 분리수거할 쓰레기를 베란다 한쪽에 모아둔다. 어느 날 플라스틱 쓰레기를 모아두는 가방에 종이가 잘못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와이프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그 사실을 지적했다.


“아줌마, 종이는 종이 버리는 데 버리셔야죠~ 신경 좀 쓰세요! “


그런데 평소 같으면 분명 장난으로 화답했을 와이프가 나의 말을 받아치지 않았다. 오히려 와이프는 접던 빨래를 옆에 내려놓고 나를 째려보았다. 물론 와이프가 그 순간 나를 째려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빨래 정리를 하며 집안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그런 사소한 일로 지적당했으니 말이다. 와이프도 정말 정색한 게 아니라 눈빛으로 투정을 부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와이프의 반응이 나의 예상을 한참 빗나가고 말았고 거기서 오해가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는 역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이후로 와이프는 삐졌거나 삐진 척을 계속했고, 나는 적극적으로 와이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진짜 서로 토라지고 말았고, 그 후 며칠 동안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고 지냈다.


3.

대부분 부부싸움이 그렇듯 이번 다툼도 내가 그 순간에 미안하다고 했으면 넘어갈 문제였다.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고 너스레 떨며 와이프에게 애교를 부렸으면 일이 크게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르다. 이 두 단어는 단 한 글자가 차이 날 뿐이고 의미도 유사하지만 단어의 쓰임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자존감은 높을수록 좋은 거지만 자존심은 그 앞에 ‘쓸데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자존심으로 자존감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장기적으로 자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반대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 도대체 사랑하는 사람을 상대로 자존심을 세워서 뭐 어쩌겠다는 말인가. (물론,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결국 며칠 뒤 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대화를 요청했고, 대화를 통해 쌓여있던 오해를 풀었다. 그로부터 장난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평소 같은 분위기로 돌아가기까지 또 하루 이상 걸렸다. 결과적으로 대화를 며칠씩이나 유예하면서 시간은 시간대로 날리고, 먼저 대화를 요청함으로써 자존심도 구기고 말았다. 물론 애초에 쓸데없는 자존심이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버리기로 했지만 말이다.


4.

피할 수 있는 싸움은 피해야겠지만, 싸움은 이처럼 예고 없이 사소한 일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싸우게 되었을 때 ‘잘 싸우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부부싸움에 매듭을 지으며 우리는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빨리 화해할 것을 다짐했다. 즉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상대가 먼저 손 내밀기를 기다리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우리의 싸움은 매번 다르고 나름의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행복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비슷하다는 것을 나는 지금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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