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과 집안일에 관하여
1.
“띵디디딩~ 디디딩딩…”
비발디 ’ 겨울‘ 의 멜로디가 베란다로부터 들려온다. 세탁이 다 됐다는 소리다. 도입부 멜로디만 연주한다지만 알림음으로 사용하기에는 확실히 너무 길다.
“…띵 디디디디 딩디리리딩 딩디리딩디 딩디리딩디 딩디 딩디리딩디 딩딩”
신혼집으로 이사하며 산 최신 세탁기는 어플로 알림음을 변경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처음 접한 신문물이 신기해서 이사 직후 알림음을 바꿔놓은 게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부모님 집 세탁기에도 이런 기능이 있었나?’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는 부모님 집에 살았다. 그런데 부모님 집 세탁기가 무슨 소리를 냈었는지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2.
토요일 오전에 세탁기를 돌리는 게 우리 집 루틴이 되었다. 보통 토요일 오전에는 별다른 계획이 없기 때문에, 나와 와이프는 아침에 세탁기를 돌려놓고 각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세탁기가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는 동안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비발디 겨울의 멜로디가 집안에 울려 퍼진다.
한참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누군가 먼저 움직이는 법은 결코 없다. 마치 정해놓은 것처럼, 연주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3.
결혼 전 가전을 장만할 당시 세탁-건조 일체형 가전이 삼성과 LG에서 막 출시 됐었다. 새로 출시된 세탁-건조기는 별개의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는 것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기에 이 최첨단 가전은 나에게 ‘투머치(too much)’라고 느껴졌다.
‘세탁이 끝나면 건조기로 세탁물을 옮기는 게 뭐 대수라고.’ 집안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가전 구매에 조언을 해주시던 어머니가 이 최첨단 가전에 자꾸 미련을 보이셨다. 심지어 돈을 보태줄 테니 일체형 세탁-건조기를 구매하라고 까지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세탁기와 건조기를 별도로 구매했다.
4.
엄마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때 조금 더 돈을 보태서라도 일체형 세탁 건조기를 살 걸 그랬나..’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빨래를 옮길 때마다 어머니의 제안이 자꾸 생각난다.
결혼 전 부모님 집에 살 때는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내 방만 잘 정리하면 됐다. 부모님은 그 외 아무것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부모님 집 세탁기 소리를 모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집안일을 하나도 도와드리지 않은 게 새삼 죄송하다.
5.
세탁물을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옮기는 이 별거 아닌 일이 내 일이 되자 크고 귀찮은 일로 느껴진다. 세탁기의 연주가 끝나고도 한동안 아무도 행동을 하지 않으면 곧 핸드폰으로 알림이 온다.
“세탁이 끝났어요. 세탁기에 세탁물을 오래 두면 냄새가 날 수 있어요. 바로 건조하러 가볼까요?”
요즘 가전은 참 친절하기도 하지. 나와 와이프 둘 다 핸드폰으로 알림을 받는다. 친절인지 협박(?)인지 모를 문구를 보면 그제야 둘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조치를 취한다.
6.
오랜 연애의 경험치가 쌓여 알게 된 게 있다면 나와 와이프는 항상 이런 사소한 것으로 다툰다는 것이다.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비교적 비중이 큰 집안일은 자연스럽게 업무가 나뉘었다. 내가 보통 요리를 하고, 와이프가 설거지를 한다. 가끔 와이프가 요리를 할 때는 내가 먼저 나서서 설거지를 한다. 그렇게 하자고 규칙을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이는 공정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한 결과다.
하지만 세탁물을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옮기는 행위는 어떤가. 너무 사소해서 집안일로 보기도 어려운 일, 그렇기 때문에 당번을 정해놓기도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비발디 겨울의 연주가 끝나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행히 아직 이 일로 다툰 적은 없다. 이 글을 씀으로써 높은 확률로 다툴 뻔한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고 믿고 싶다.
7.
군 복무 시절 초군반에서 교관님이 반복해서 하시던 말씀이 있다.
“언젠가 해야 되면 지금 하고, 누군가 해야 되면 내가 하고, 어차피 해야 되면 즐겁게 해라. “
교관님은 이게 군 생활을 잘하는 비결이라고 했다.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도 군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결혼하고 알게 된 것은 이게 비단 군 생활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생활을 잘하는 비결도 결국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