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연애의 동화 같은 엔딩, 그 후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게 됐어?”
우리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로부터 종종 듣던 질문이다. 나에게는 딱히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없다.
진부한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와 와이프는 오랜 시간 만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고, 결혼 정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답변에는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단골 질문들이 뒤따른다.
"대단하다, 어떻게 11년 동안 한 번도 안 헤어질 수 있어?” "다른 사람 안 만나보고 결혼하면 아쉽지 않아?"
이런 질문에 나는 보통 대답을 얼버부리고 말지만, 그로 인해 나와 와이프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는 결혼하기 11년 전에 교회에서 와이프를 만났다. 이 글을 읽고 기고만장해할 와이프 표정이 상상돼서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는 싫지만… 먼저 좋아한 건 나였다. 와이프와 가까워지기 위해 나는 전략적으로 행동했다. 먼저 친구들과 여럿이 친해지고, 점점 둘만의 약속을 잡고, 결국 와이프도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용기 내어 고백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와이프와 나는 스무 살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와이프는 내가 사귄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친구다. 그런데 그렇게 될 줄 몰랐던 당시 짓궂은 친구 한 명이 장담하듯 말했다.
“너네 1년도 못 가서 헤어질걸?”
그러면서 1년을 채우면 기념으로 아웃백에서 저녁을 사주겠다고 나를 도발했다. 1년은 금세 지나갔다. 나는 잊지 않고 와이프와 아웃백을 다녀왔다. 영수증을 보여주자 친구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웃백은 없던 일로 하고, 결혼하면 냉장고 사줄게, 냉장고!”
그때 친구는 우리가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또 1년이 지나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는 (아직) 냉장고를 사주진 않았지만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며 또 한 번 우리의 앞날을 멋쩍게 축복해 주었다.
친구의 예상을 뒤엎고 우리는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올 수 있었을까? 위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냉장고 때문에 11년 동안 헤어지지 않고 결혼까지 한 거 아니냐며 내 친구에게 공을 돌리기도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처음에는 우리가 장기연애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무던한 성격 때문이라고 적었다. 자주 다퉈도 크게 싸운 적이 없었고, 권태기도 글쎄, 그런 게 있었나 싶다. 연애 초반의 설렘이 잦아드는 것도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자 더 이상 로맨스에만 의존하지 않는 성숙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서로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고 적었다. 다른 이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냐고? 안 그랬을 리가. 콩깍지는 오래가지 않아 벗겨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외모도 변했다. 스무 살, 아직 젖살이 남아 윤기 있던 와이프의 얼굴은 나이가 계란 한 판에 가까워지자 골격이 뚜렷해졌고 웃을 때 생기던 팔자주름은 이제 웃음이 멈춘 후에도 희미하게 자리를 지킨다. 와이프도 나에 대해 할 말이 많을 테지만.. 이 지면에서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서로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스포츠 스타가 더 높은 연봉을 마다하고 고향 팀에 남아있고, 그런 선수를 팬들도 사랑하는 것처럼. 남녀 간의 사랑에서 로맨스를 걷어내면 남는 것은 의리 아닐까. 함께한 세월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동료애는 더욱 깊어졌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20대 연애 초반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와이프는 내 눈에 여전히 예쁘고, 외모와 상관없이 나는 와이프 사랑한다. 사귄 지 11년이 지나 부부가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이에 로맨스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단지 오랜 기간 만나며 남녀 관계에 로맨스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무던한 성격과 서로에 대한 의리.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연애하며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성격과 의리는 장기연애의 충분조건이 아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우리가 ‘운’이 좋았다는 거다. 애초에 서로를 만날 수 있었던 것부터 행운이었고, 오랜 기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주변의 도움이 있었고, 환경과 상황이 따라주었으니 결국 우리가 의리도 지키고 어려움도 무던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나는 와이프와 내가 함께 할 ‘운명’이었음을 직감한다.
“결혼식이 끝난 후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동화였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식장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축복을 빌어주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래서, 결혼하고 행복하냐?”
나는 이러한 질문에 똑같이 묘한 미소로 답한다.
“네, 행복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