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을 함께 헤쳐 나간 우리의 결혼준비 에피소드
결혼 준비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드레스 투어’ 다. 드레스 투어란 결혼식 날 입을 드레스를 정하기 위해 여러 드레스샵(가게)을 돌아다니며 드레스를 입어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유명한 '스드메'의 '드'에 해당한다.
보통 드레스 투어는 신랑의 동행 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신랑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신부가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때 ‘헉’ 하며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에 놀란 리액션을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예비 신부(현 와이프)는 11년의 연애 끝에 내가 무미건조한 ‘리액션 거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나도 이것을 장기연애를 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드레스 투어를 갈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드레스 투어를 가기 며칠 전, 예비 신부가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임무를 부여했다.
“드레스 투어 가면 사진 못 찍으니까, 나중에 투어 끝나고 드레스 선택할 때 비교할 수 있게 스케치해 줘야 해.”
"뭐? 그림을 그리라고..?"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다. 물론 예비 신부는 내가 그림에 소질이 없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기대치 또한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어본 드레스에 대한 기억을 나의 스케치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드레스 샵들은 드레스 디자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알아본 모든 드레스 샵은 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를 통해 자신들만의 드레스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드레스 투어를 가는 사람들은 이런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미리 골라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매장에서 직접 입어볼 때는 촬영이 금지된다. 최근에는 사진 촬영을 허용하는 샵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샵이 사진 촬영을 제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불편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드레스 투어에 나서는 사람들은 단 하루 만에 서너 곳의 드레스 샵을 방문한다. 한 곳에서 평균 3벌 정도의 드레스를 착용해 본 후,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를 그날 바로 선택한다. 이 과정은 말 그대로 ‘투어’처럼 바쁘게 진행된다. 하지만 평생 한 번뿐인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과정이 이렇게 성급하게 진행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 보자. 우리가 비싼 물건을 살 때는 먼저 다양한 선택지를 조사하고, 사양과 가격을 비교한다. 더 신중한 사람이라면 할인 혜택이나 A/S 정책까지 꼼꼼히 따져본 뒤, 며칠 혹은 몇 주를 고민한 끝에 최종 결정을 내린다. 극단적인 사례로 내 와이프는 새 휴대폰을 고르는 데 1년 넘게 고민하다가 결국 새로운 모델이 출시되면서 다시 처음부터 고민을 시작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런 와이프조차 웨딩드레스만큼은 단 하루 만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게다가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면서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드레스샵이 ‘당일 계약 시 할인(혜택)’ 프로모션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방식은 드레스샵만의 전략이 아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비교를 통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결혼식장, 신랑 예복, 예물 등— 마찬가지다. 업체들은 소비자들의 정보를 제한하고, 시간적 압박을 가해 최대한 빠르게 계약하도록 유도한다.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드레스샵의 정책과 이러한 당일 계약 할인 시스템은 예비부부의 합리적인 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평생 단 한 번 입을 웨딩드레스를 고르면서도 충분한 정보와 고민할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결혼 업계는 이러한 중요한 결정을 ‘즉흥적인 소비’로 만들려 하고, 대부분의 예비부부는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드레스 투어 당일, 나는 와이프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태블릿 화면에 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리액션을 해야 되는 순간에 나는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했다. 나 같은 T형(MBTI) 인간은 마른 수건에서 물 짜내듯 리액션을 해 봤자 오히려 역효과 날 가능성이 크다. 그 순간에 차라리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투어를 마치고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내가 그린 그림을 넘겨보며 우리는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림은 드레스를 선택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예비 신부를 웃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심지어 예비 신부는 내 그림을 동네방네 퍼뜨리며 자랑(?)까지 하고 다녔다.
결혼 업계는 맹수들이 드글거리는 정글과도 같다. 결혼을 앞둔 커플들은 살면서 단 한 번 그곳을 거쳐갈 뿐이라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적극적으로 컴플레인을 걸지 않는다. 업계는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결혼 업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작성한 글, 결혼 업계의 횡포를 폭로한 기사 등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분명히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결혼을 앞둔 커플이라면 업계의 변화를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서로를 의지하여 정글을 용감히 지나갈 수밖에.
내가 그린 그림은 결혼 업계를 마주한 커플들의 무력함을 상징한다.
작품명: 결혼식을 올리기 위한 처절한 손 부림 / 부제: 그림 못 그리면 결혼도 못 하나요?
하지만 동시에 결혼 준비의 즐거움도 내포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제일 빨리 가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라 했던가. 함께라면 정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