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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귀니 Apr 21. 2024

죽어야 나간다는 정신으로

세라밴드가 알려준 삶의 태도


평소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데다가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으로 주변이 늘 어지러운 편이다. 이 문제로 집에서나 직장에서 지적을 많이 받아왔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미혼시절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내 자취방을 방문하고는 직접 정리해 주고 간 적이 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데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아기까지 낳은 건 거의 기적에 가깝다. (그 동생은 그 일을 계기로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만 같이 살기는 어려운 사람이라 말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내 생각에 반전을 가져다준 사건이 발생했다. 스트레칭 운동을 위해 사용하던 세라밴드가 끊어진 것이다.


운동용인만큼 어마어마한 탄성을 자랑하는 이 제품. 임신 전부터 최근까지 약 2년 가까이 나의 통증과 더불어 살아온 이 아이가 운명했다. (임신 내내 가방에 넣어 다니며 수시로 스트레칭을 할 정도로 도움을 많이 받은 고마운 물건이기에 '아이'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임산부 시절 여행가서 스트레칭하던 내 모습


종종 아기 옆에 누워 스트레칭을 할 때가 있었는데 무엇이든 입에 넣고 보는 우리 사랑이가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세라밴드를 씹어먹는 사랑이


잘근잘근 씹더니 작고 하찮은 이 여섯 개로 밴드의 귀퉁이를 뜯어버렸다. 아주 조금 뜯겼기에 그냥 사용했다. 그러던 중 여느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밴드를 늘여 어깨 신전운동을 하던 중 '툭' 하는 소리가 났다. 아이가 완전히 두 동강 나 버린 것이다. 결국 아이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새로 구입한 세라밴드와 운명한 세라밴드. 동일제품으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2년 가까이 줄기차게 사용했으니 쿨하게 보내줄 만도 한데 이상하게 버리려니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밴드가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스트레칭해 온 내 삶의 훈장 같다고나 할까.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 같던 밴드도 시간이 지나니 끊어졌다. 작고 여린 사랑이의 유치 6개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단지 여느 날과 같이 스트레칭했을 뿐인데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낙숫몰이 댓돌을 뚫는다'는 속담처럼 결코 이루기 힘들 것 같은 일도 매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재활을 향한 나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이 아이를 어떻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죽어야 나간다는 생각으로 모든 물건을 대한다면 나의 육아휴직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가정 경제를 살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물건에만 해당할 뿐 사람은 예외다. 아프면 바로 조치를 취해야지 죽어서 나가면 절대 안 된다. 생명은 소중하니까.  


다소 지저분하지만 쉽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좋다.


단점을 단점으로만 보기보다 장점으로 전환하려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다소 억지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나뿐만 아니라 타인과 환경을 대할 때도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가진다면 일상이 행복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나에게 관대하고 타인과 세상을 너그럽게 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를, 또 그런 사람들이 모여 더 좋은 세상이 되기를 오늘도 꿈꾼다.


(그래도 정리는 잘하도록 노력해 보자. 이제 나는 사랑이 엄마고 우리 아기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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