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1년, 출산휴가 3개월. 1년 3개월간의 휴직이 곧 종료된다. 즉, 급여 없는 백수가 될 삶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중이다.
임신, 출산, 육아. 결코 녹록지 않다. 휴직이 끝나도 나의 육아는 계속될 것이기에 전업주부라는 타이틀이 남겠지만 전업주부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나의 살림실력은 형편없다.
26살에 간호사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29살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30살에 결혼을 했고 31살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에도 직장을 몇 차례 옮기거나 잠깐씩 쉬기도 했지만 꾸준히 일했다.
원하던 전문상담사의 길을 걷기까지 고충이 많았다. 내가 가려는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이 불안했고 흔들렸지만 결국 해냈다. 수입은 적었지만 성장할 기회이기에 감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되었다.
이후 내 삶은 많이 달라졌다. 변화와 성장보다는 가정에 도움이 될만한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했다. 사설상담센터 근무경험으로 나에게는 상담센터를 개업할만한 배짱과 용기가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부산광역시 교육청 공무직 공채에 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내가 보유한 임상심리사 2급, 전문상담사 2급으로 응시가능한 부분을 확인했다. 알아보니 교육청 위센터 소속 상담사로 근무할 수 있다고 한다.
비록 공무원이 아닌 공무직이지만 정년 60세가 보장되고 오래 일할수록 근속수당이 붙기에 내가 원하던 직장이라 판단되어 수험서를 구매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수학이 너무 어렵다. 나 펭귀니.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다.
교육청 위센터 전문상담사를 채용하는데 확률과 통계가 웬 말이냐. 이게 바로 관료주의의 한계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다가도 부모님이 나에게 투자하신 수학 문제집과 과외비용이 떠올라 마음이 숙연해졌다. 내 수학점수는 공개할 수 없다. 부모님께 불효를 저질렀는데 공개적인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수치심까지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결국 문제집을 덮고 공무직 시험은 포기했다.
간호사 채용사이트에 접속해서 인근병원의 일자리를 검색해 보았다. 일할 만한 곳이 눈에 띄었다. 당장 일하러 갈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그럴듯한 일자리를 원했다. 욕창을 소독하고 소변줄을 삽입하는 간호사의 업무가 싫었다. 내 책상이 있는 사무실에서 고상해 보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이 없었다.
상담사로 근무하며 성과가 괜찮은 편이었다. 휴직 기간 동안 센터장님으로부터 복직해 달라는 전화를 여러 번 받았고 센터개업을 권유받기도 했다. 상담사를 업으로 택할 것을 강력히 추천하신 지도교수님, 깐깐하기로 유명한 인턴 근무지에서 공개사례발표회 시간에 받은 칭찬.
비록 돈 되는 일은 아니었고 과정도 험난했지만 얻은 것도 많다. 아마 꾸준히 이 길을 가기로 선택한다면 10년 뒤의 내 모습은 어떨까?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상담수련에 돈이 많이 든다. 급여의 일부분을 꾸준히 교육비에 투자해야 하기에 가정경제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중소병원일지라도 간호사의 길을 간다면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적당히 벌고 적당히 행복한 삶.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삶. 그럴듯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렸기에 어떤 자리에서 어떤 업무를 하든지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도록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
애를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 엄마가 되기 전에는 꼰대 같은 말이라는 생각에 듣기가 싫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철이 드는 스스로를 본다.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구나. 뭐든 경험한 만큼 보이는 법이다.
비록 공무직 시험은 포기했지만 이렇게 나를 알아가는 에세이를 쓰고 있으니 이 또한 가치 있는 경험이다. 중고서점에 팔면 새책이라 반값은 건질 테니 너무 낙심하지 말자. 만 원에 인생공부했으니 가성비가 꽤 괜찮다. 내일은 툭 털고 일어나 중고책방으로 산책이나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