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성혜는 반지하 월세 살이 취준생이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으로 입사했으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반강제 퇴사하고 지금은 신문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공시생 남자 친구 승환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성혜는 면접마다 떨어지는데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일로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되는데… 어느 날, 당신에게 5억이 생긴다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죠?
주요 등장인물 소개
성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29살 취준생 성혜.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인턴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취업의 기쁨도 잠시. 회식 자리에서 일어난 상사의 성추행을 문제 삼았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판결을 받고 사건이 종결되었다. 이후 재취업을 위해 노력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이곳저곳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승환
성혜의 남자친구로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다. 남을 돌아볼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지만 착한 성품의 그에게 험한 세상살이는 만만치 않다. 번번이 취업에서 실패하고 자기 것을 챙길 줄 모르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장면해석
성혜의 페르소나
페르소나 : 가면, 인격. 타인에게 파악되는 자아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영화사전)
재취업을 위해 다양한 회사에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 성혜. 면접관은 성혜의 이력서를 살펴본 후 "이 회사는 왜 4개월밖에 근무를 안 했죠? 인턴 기간 지나면 바로 정규직이 될 텐데요?"라는 질문을 했다. 성혜는 상사의 성추행으로 인해 부당하게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취업 학원에서 지도받은 대로 "성적이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라고 로봇처럼 웃으며 대답을 한다. 수치스러운 성추행의 아픔도 부당한 일로 힘들게 입사한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억울한 감정도 생계라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 앞에서는 휴지조각처럼 짓밟힐 수밖에 없는 사소한 영역일 뿐이다.
불면증과 공황장애로 찾아간 정신과 의사 앞에서는 대학원생으로,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서 마주친 전 직장 동료 앞에서는 편의점 주인딸이자 유학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감추는 성혜. 페르소나 이면에 감춰진 진짜 아픔은 무엇으로 치유해야 하는가.
성혜의 한숨,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앞에서의 불안
인턴 기간에 일어난 성추행 사건, 번번이 실패하는 취업, 어려운 가정형편. 통제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 성혜의 일상. 자주 긴 한숨을 쉬고 밤에는 불면증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삼각김밥과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현실을 직면하며 버텨나간다. N포 세대로 불리는 요즘 청년들의 삶을 두고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한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관점도 있고 개인의 노력부족이라는 관점도 있다. 각자의 관점은 다를 수 있지만 이 장면을 통해 청년실업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보는 관점은 굉장히 위험하고 오만한 발상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하던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은 후 자리를 치우지 않고 떠난 청소년들을 바라볼 때,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오토바이가 고장 날 때. 겨우 지탱하며 살아가던 성혜의 삶은 철저히 절망으로 바뀌었고 숨이 막힐 듯한 공포를 경험한다. 성혜의 삶은 온통 통제할 수 없는 불안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공황장애'를 진단받은 성혜의 숨 막힐 듯한 공포는 오롯이 스스로 견뎌내야만 하는 실존의 문제였다.
공황장애 : 갑자기 엄습하는 강렬한 불안, 즉 공황 발작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장애
공황발작 : 공황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급박하고도 강렬하게 엄습해 오는 공포를 공황 발작이라고 한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극심한 공포가 밀려들고, 강렬한 불안과 생리적인 공포반응이 나타나고, 이와 더불어 ‘곧 질식해서 죽을 것 같다’ 또는 ‘심장마비가 올 것 같다’는 파국적인 생각과 같은 인지 증상이 나타난다.
성혜가 공황장애로 힘들어할 때, 부모님의 교통사고로 고통받고 있을 때 그녀의 옆에는 전 남자친구 승환이 있었다. 둘은 현실의 가난 앞에서 헤어짐을 선택했지만 승환은 성혜가 힘들 때 성혜의 옆에 함께 있어주었다. 이별을 통보한 승환에게 도움을 청했던 성혜, 그 손길을 말없이 잡아주고 옆에 머물렀던 승환. 둘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앞에서 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부모님의 목숨값으로 받은 5억이 선물한 일상
성혜의 부모님은 성혜아빠의 생신을 맞아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갔다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상대차량은 재벌 2세의 차량으로 합의를 위해 5억을 건넸다. 잠시 부모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혜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내 성혜는 통장에 입금된 5억으로 무엇을 할지 즐거운 상상에 빠지고 더 이상 한숨을 쉬거나 공황발작 증세도 나타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건네거나 밥을 사기도 하면서 이전과 달리 한껏 여유 있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한숨이 미소로 바뀐 지는 오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살려고. 이 돈 잘 쪼개쓰면 40년 동안 일 안 해도 되더라고.이렇게 산다고 누가 나 욕 안 하겠지?"
성혜는 합의금으로 수령한 5억을 40년 동안 154만원으로 쪼개어서 사용할 수 있는 연금상품에 가입한다. 그녀가 사는 집도 살아가는 일상도 dramatic 하게 변한 것은 없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장면으로 연출된 것은 어두운 현실 자체가 극적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전과 달리 한껏 미소 짓고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실존과 '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제대로 기능하는 인간의 모습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사소한 일상조차 사치였던 성혜의 삶을 통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어떤 삶의 모습을 꿈꾸는지,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비교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은, 열등감을 가리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