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분명히 들었습니다만
불안한 엄마의 반성문
어느덧 사랑이가 우리 부부에게 찾아온 지 237일(만 7개월22일)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 옹알이가 점점 다양하게 바뀌더니 ‘아빠’를 시작으로 ‘엄마’까지 말하기 시작했다. 이 감격의 순간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순간포착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사랑아. 엄마라고 해 봐. 엄마, 엄마”
구걸에 가깝게 매달리다 촬영을 포기하면 그때서야 “엄마”를 내뱉는 사랑이. 고군분투 끝에 겨우 영상을 건졌을 땐 마치 개선장군처럼 마음이 웅장해졌다. 이렇게 어렵게 얻은 결과물을 나 혼자 보기는 아까워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에 업로드했다. ENFP지만 나름 소심한 관종이라 ‘#내귀에만들리나요’ 라는 태그까지 넣어 지인들의 반응을 살폈다.
“오오! 들린다!” 사촌동생의 댓글에 안도했다.
‘내 귀에만 들리는 게 아니구나.’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사랑이가 나를 ‘엄마’라고 불렀을 때의 희열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쉬운 임신, 쉬운 출산은 없지만 여러 고비를 넘기고 힘들게 품고 낳은 아기였던 터라 그 의미가 사뭇 남달랐다.
교회에 감사헌금을 했다.
‘사랑이가 엄마아빠를 말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예배 마치고 교회 여집사님 한 분이 사랑이가 벌써 엄마를 말하냐며 궁금해하셨다. 촬영해 둔 영상을 자신 있게 보여드렸는데 내가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다. 마치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분명 인스타그램 댓글로 엄마로 들린다는 지인들의 반응을 확인했음에도 내 귀에만 엄마로 들리는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내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고 허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도치맘인가 봐요. 엄마는 언젠가는 하게 되는 거니까요. 제가 양치기 소녀 하죠 뭐. 감사헌금까지 했는데 헌금 회수해야하려나봐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물었다.
“내 귀에만 엄마로 들리는 걸까?”
“나도 엄마로 들려. 다른 사람말보다 엄마인 네 귀에 엄마로 들리는 게 중요하지 뭐.”
그렇다. 내 귀에 ‘엄마’로 들린다면 다른 사람의 반응이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집사님께서 그냥 장난치려고 하신 걸 수도 있어.”
“그런가? 나도 잘 모르겠네.”
장난인지 진심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집사님의 말에 사랑이를 향한 나의 확신이 흔들렸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를 제대로 사랑하려면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은 생후 1년 내 아기의 발달과업을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신뢰감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내가 본 내 아이를 믿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이 아이와 신뢰감을 쌓아갈 수 있을까? 그저 단순한 에피소드로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또 나는 나의 불안을 인식한다.
‘그냥 장난치신 거 아냐?’라며 가볍게 여기는 남편과 달리 나는 ‘정말 내가 잘못 들은 것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불안했다. 또 한편으로는 ‘헌금회수해야겠다는 내 농담을 듣고 나를 안 좋게 생각하시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으로 신경이 쓰였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머는 고급스러운 방어기제이다. 유머로 나의 불안을 감출 수 있었고 주위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농담을 듣고 즐거워했다. “헌금으로 그런 경박스러운 농담을 하다니!”라는 말을 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이 쓰이는 건 내 마음의 영역이다. 혹여 누군가는 나를 경박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어떤 문제가 되는가?
내 귀에 ‘엄마’로 들릴 수 있지만 다른 이에게는 아닐 수 있다. 나의 농담이 어떤 이에게는 재미있는 유머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교양 없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모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검열한다면 행복을 만끽해야 할 기쁨의 순간을 놓칠지도 모른다. 나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반면 타인의 말로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 또한 나의 영역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결말은 결국 불안장애 내지는 강박장애일 것이다. 이렇게 또 ‘경계’의 의미를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