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세주
"세주야~ 왜 대답이 없니? 그새 나를 잊은 거야?"
이 사연은 '구구절절'한 정도는 아니라서, '구'는 빼고 '세주'라 부르기로 한다. 나의, '(구)세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거짓말처럼 집안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엄마가 겨우 마련한 단칸방 천장에는 두 손을 뻗으면 가려질 것 같은 작은 창문이 있었다. 말이 좋아 창문이지 열 수도 없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방에 그저 세상에 빛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는 유일한 밝음이었다. 달빛이 일렁이던 까만 밤이었다. '후다닥'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쥐새끼 한 마리가 그 창을 통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을 뒤통수에 달고 마치 메시아라도 된 듯 보였다. 나를 깔아보듯 쳐다보던 그 반들거리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가난이란 게 이런 거란 걸, '찍찍'거리며 약 올리듯 알려주었다. 벗어나야 한다고 이를 악물게 만든 쥐새끼 한 마리가, 열아홉 살에 만난 나의 첫 번째 '세주'였다.
드립다 마셔댄 막걸리처럼, 말 그대로 만취해서 '스무 살의 자유'를 부르짖던 날들이 있었다. 그 덕에 알게 되었다. 뭘 하면 내가 행복한지, 뭘 안 하면 안달이 나는지. 가난은 더 이상 굴레가 아니었다. 언 땅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날에, 무겁고 칙칙한 외투를 벗어 던지듯, 그렇게 떨쳐낼 수 있는 거란 걸 알았다. 막걸리와는 달리, 숙취 걱정 없는 한마디 “목표가 희망이다.” 그 말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게 나의 두 번째 ‘세주’였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의 방향을 틀었다. '왜 샛길로 빠지려 하냐'고, 지도교수에게 눈빛으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취해 있으니 맞아도 아픈 줄 몰랐다. 가보지 않은 길이 나도 두려웠다. 멈칫거릴 때마다, ‘세주’가 슬며시 등을 떠밀듯 토닥여주었다.
긴 연애 기간과 결혼, 당연히 자신이 '세주'일 거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들으면 섭섭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정도는 아니다.' 돈이 드는 일은 아니라서, 말은 그렇게 해줬다. 그게 서로를 위한 거란 걸,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피차 알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퉁' 치는 게 일상인 나의 세 번째 '세주'이다. 다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봐야 소용없다. 우스갯소리로 자식들은 아기였을 때 이미 할 효도는 다했다고 한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연애하는 동안 평생 할 사랑, 대화, 믿음을 알뜰하게 싹싹 긁어서 다 써버렸다. 함께한 시간을 뿌리 삼아 흔들림 없이 곁에 서 있어주는 걸로 충분하다. 다행인 건, 여태 '퉁'치며 살았어도 아직 남은 게 있다는 거다. 얼마 남지 않은 탓에 감춰둔 곶감 빼 먹듯 조금씩 아껴 먹을 생각이다. 달짝지근했던 연애 시절이 가끔 그리워질 때마다.
과거의 '세주'는 추억이 되었고, 현재의 '세주'는 그냥 지금처럼 '퉁' 치며 살면 된다. 그렇다면 내 미래의 '세주'는 무엇일까. 얼굴이 벌게질 걸 각오하고 써야겠다. 미래의 '세주'는 바로 '나'다. 본 적 없는 나, 간이 콩알만 해져서 뻗대고 있는 나를 끄집어내야 한다. 믿을 건 그것뿐이다. 이렇게 개발새발 자판을 두드리게 만든 그 '세주'를 만나야 한다.
먼 훗날,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너는 나의 '세주'가 아니라, 마지막 '구세주'였다고. 다만, 사이비 '세주'는 되지 않기를 바라며,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성호를 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