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antasy
서랍이 꽉 닫히지 않은 채 뭔가가 끼어 있다.
빨강인 듯도 하고 검정인 듯도 하다. 열어보지 않고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정리되어 있지 않은 서랍을 여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그게 무언지 궁금해서 계속 째려보다시피 하고 있다.
천천히 조금씩 다가간다. 마치 어릴 적 술래잡기를 하듯 한 발 움직이고 숨도 멈춘 채 섰다가 다시 한 발....
서랍 양쪽의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 서랍을 당겼다.
쏟아져 나왔다. 빛처럼 연기처럼 아는 단어를 다 동원해도 표현할 수 없는 갖가지 색들이다. 판도라의 상자인가. 그간에 내가 결계라도 치고 있었던 걸까.
뒤돌아보지 않고 들여다보지 않은 날들이 그 속에서 터져 나왔다. 창틈으로, 문틈으로 날아가 버린 날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이다. 나풀거리며 눈앞에서 흔들리다 천천히 낙하하는 깃털 같은 기억을 두 손으로 받았다. 머리 위에도, 발등에도, 어깨 위로도 내려앉았다.
기억해야 한다. 새털처럼 가볍게 생각했던 날들과 그날의 나를 기억해 내야 한다. 점점 꼬리부터 잘려 나가 이제 몸통의 일부분만 남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라져가고 있다는 허전함, 비비적거리며 지나온 흔적이라도 남긴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 흔적 없이 사라져도 괜찮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나는 나를 기억해 줘야 한다.
서랍을 뒤집어 남겨진 거 하나 없이 탈탈 털어본다. 쏟아진 날들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해 보려 한다. 감춰져 있던 작은 구슬 하나를 들고 햇살 좋은 창가로 간다. 눈동자 가까이 대본다. 점점 커지고 선명해지는 판타지 같은 내 꿈들이 거기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