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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을 걷다

'에움길' 나를 사로잡다

by 펜 끝

'에움길'. 낯설었다. 생판 처음 듣는 단어 하나가 이렇게 가슴에 콕 박히는 뭔가가 있다는 게 더 낯설었다.

'설움'이 복받친다. 아는 게 없어서이기도 하고, 뜻도 모르는 그 단어가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알았다는 듯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지름길'의 반대말이라고 했다. 이 낯선 단어가 나에게는 '빨리 가고 싶지 않은 길', 두르고 둘러 굽이굽이 원을 그리며 그렇게 천천히 가고 싶은 길로 들렸다. 그러려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디로 가면 지름길이고 어디로 가면 에움길인지, 그건 선택의 문제처럼 느껴졌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 이미 정해진 우리 삶의 길이지만 그 길을 후딱 지름길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종착지까지는 가급적 천천히 느리게 가고 싶은데, 마음이 바빴다. 빨리 자리 잡아야 하고, 빨리 키워야 하고, 빨리 벌어야 하고, 빨리 사야 하고, 빨리 팔아야 하고, '빨리, 빨리'를 외치며 발을 동동거리고, 가는 내내 지름길을 힐끔거렸다.


어릴 때 모래 해변에서, 늘 하던 놀이가 있었다. 막대기를 하나 들고 팔을 쭉 뻗어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원을 그리곤 했다. 세상의 중심은 나였다. 그 중심에 선 나는 선명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원 안에서 나가지도, 누군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그 원은 넘어서는 안되는 금이 되었다가, 벽이 되었다. 어른이 된 것이다.


생의 파도에 휩쓸리며 그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어른의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이제는 입이 꽉 다물어진 완벽한 원을 그리지 않는다. 막대기를 들고 보이지 않는 저 끝을 향해 마음껏 팔을 휘저으며 선을 그려본다.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해도 미련 한 톨 남지 않을 만큼 걷고 싶은 그 길, 나만의 에움길을 찾는 중이다.


처음 느꼈던 '설움'은 살아온 날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고,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준 누군가의 '도움' 때문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건, 삶의 종착지까지 이어질 기나 긴 에움길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빨리 쓰고, 빨리 등단하고, 빨리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은 쓰는 삶에 대한 목적이 아니다. 한낱 목표에 불과하다. 타박타박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반가운 꽃 한 송이쯤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 꽃을 꺾기 위해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도 없지만, 그러다가는 꽃이 아니라 펜을 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글쓰기야말로 스스로 에움길로 들어서야 할 일이지 않을까. 그 길을 따라 펼쳐질 매일, 매월, 매년.... 그 모든 날을 속속들이 느끼며 걷고 싶다. '나다움'을 위해 '비움'으로써 '채움'이 된다는 걸 소름이 돋듯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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