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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안녕하신지요?

허수아비 같았던 하루를 보내며.

by 펜 끝

펄떡이며 뜨거웠던 사랑도 그렇게 바스락거리며 메말라가기도 한다는 걸, 너나 할 것 없이 허수아비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되는 그런 사랑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아버렸죠.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제 머리 위에 앉아 속삭이더군요.

"난 네가 무섭지 않아. 넌 진짜가 아니잖아."

이렇게 의젓하게 서서 하루를 견디고 있는데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울고 싶었지만, 아침에 그려 넣은 미소 띤 입술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요. 대꾸 한마디 하지 못했죠. 뺨 한 대 갈기고 싶었는데 팔을 흔들 수가 없었어요. 뛰어가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죠. 팔이 너무 아픈데 잠시라도 늘어뜨리고 쉴 수가 없었어요.

살아내야 하니까, 이렇게 서 있었던 적이 몇 번 있었어요. 허수아비처럼 말이죠. 이상한 일이죠? 허수아비도 아픔을 느낀다는 게 말이에요.


황당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어요. 그날 겪은 일보다 더 황당한 얘기를 읽으면, 겪은 일이 우스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집어 든 게 『오즈의 마법사』였어요. 도로시가 뇌가 없는 허수아비에 이렇게 묻더군요.

"뇌가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어요?"

"잘 모르겠지만....사람들도 생각 없이 말을 많이 하지 않니?"

웃다가 울먹거렸어요. 너무 맞는 말이라서 슬프더라고요.


소나기를 만나듯, 갑작스레 허수아비가 되기도 했어요. 씨랜드, 세월호, 이태원....정말 뇌가 없는 듯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날의 허수아비는 말 그대로 '헛된 아비'였어요. 자식을 지키지 못한 숱한 아비 중 하나였죠. 아비의 심장이 불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지고, 눌려서 터져버렸지요.


선택의 여지가 없을지 몰라요. 원하지 않아도 두 팔을 벌리고 한쪽 발을 땅속에 박고 서서 홀로 외로워야 할 날들이 또 오겠지요. 하지만 누군가는 내게 밀짚모자를 씌워주고, 새 옷을 입혀주기도 할 거란 걸 알아요. 살이 오르듯 새 짚을 가슴에 넣어줄지도 모르고요.

바람이 하나 있어요. 손끝이 아리도록 밭고랑을 매던 누군가가 날 찾아와 목 놓아 고단함을 털어놓고 혼자 씩씩해져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준다면 아무리 팔이 아파도 견딜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팔을 흔들어 당신의 안녕을 물을 수는 없지만, 바람결에 안부의 편지 한 장 보냅니다.

"오늘도 안녕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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