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 심채경님의 일기 : 생존일기

[일기의 사람들 시리즈]

알쓸인잡을 한참 재미있게 보다가 일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귀가 쫑긋했다.



지난 22년 간 일기를 써오며 느꼈던 것들이 패널들의 말 한마디 말 한마디에 담겨있는 것 같아서 흥분했다. '역시! 나만 그렇게 느낀게 아니었어'라는 찐한 공감이 솟구쳐오른다. 요약해본다.


[천문학자 심채경]
이공계 출신인데 책을 냈다보니 학부모들이 자신에게 아이들 작문실력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볼 때가 꽤 있다. 그러면 자신은 일기를 많이 썼다고 대답한다. "일기쓰면 도움될까요"라고 되물어보면 일기가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대답하곤 했다. 자신은 '중2병'이 왔을 때 당시 힘들었던 일들에 대해 일기를 썼었다. 그 시절 일기는 거의 데스노트 수준이었다. 그렇게 일기를 쓰니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힘을 얻었다. 공개하는 일기가 아닌, 자신만 보는 비공개 일기가 필요하다.


이번에 '일기에 진심인 편입니다'란 브런치북을 집필하며 나에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생존일기'였다.



2005년, 집안을 일으켜세웠던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고 나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공황장애를 겪었다. 그 때 써내려갔던 것이 일기다. 밑바닥까지 내쳐진 정신을 부여잡으려 끄적거렸던 기억이 난다. 심채경님의 말씀이 맞다. 비공개 일기가 생존에 정말 도움이 된다.


다른 분들도 일기의 쓸모에 한마디씩 보태셨다.


[법의학 교수 이호]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즉, 미래에 대한 희망없이는 일기를 쓰지 않을 것이다. 나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삶을 향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설가 김영하]
"그렇다.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힘들고 우울한 상황에서도 일기를 쓰고 있다는 말은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가 맞다. 절망적인 말이 많이 담긴 일기라도 미래의 자신이 읽게될 일기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역경을 어떻게든 풀어내고 싶어서 어려운 수학문제의 풀이과정을 암산이 아닌 손으로 쓰며 플어내려하듯, 일기란 기록으로 인생문제 풀이과정을 써보는 것과도 비슷하다. 해결의 희망을 품고.


그리고 일기가 자신의 역사란 말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일기와 역사의 유사점에 대해서도 글을 쓴 적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나와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이렇게나 기분좋게 안절부절하는 일이다.


역사책이 없는 나라를 상상해보면 역사기록이 나에 대한 애정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좀 더 와닿는다. 그리고 역사에 신경쓰지 않는 나라와 집단이 어떤 일을 겪는가 생각해보면 꽤 끔찍하다. 결국 목소리 크고 힘있는 자들과 악랄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이긴 자들이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바꾸지 않는가. 이번에 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서울의 봄' 영화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국가든 나 자신이든 잘되기를 바라는 애정이 있을 때 자주 등장하는 반응 중 하나가 솔직하고 구체적인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일기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의 역사이고 나는 내 인생의 역사가다.



[물리학자 김상욱]
"글을 쓰고 나면 자기객관화가 잘 된다. 내 의견이지만 글로 읽어보면 제 3자가 쓴 글을 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파악을 하고 싶을 때 일기가 도움이 된다."
[소설가 김영하]
"문법의 힘이 영향준다. 언어화 되어 있지 않은 감정을 글로 쓰면 문법의 영향 아래로 들어간다. 문법은 논리의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격렬한 감정이라도 문법을 지켜쓰다보면 논리로 감정이 다듬어지는 것이다."


일기는 감성 뿐만 아니라 이성도 보듬어줄 수 있단 의미다. 맞다! 일기하면 감성적인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는데 꼭 그런 '감성일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감정을 쏟아내고 생존했다면 그 이후에는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파악하여 성장해야한다. 그럴 때도 일기가 도움이 된다. 이분들에게 내적친밀감이 부쩍 차오른다.


누군가가 비공개 일기를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경험은 꽤 특별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말그대로 비공개 이기 때문에 딱히 누군가에게 알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SNS나 블로그 등에 공개일기는 흔하기 때문에 예외다.)


때로 위와 같이 방송에서 일기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거나 일기관련 도서를 발견했을 때 비공개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알게 된다. 또는 스마트폰의 일기앱 리뷰에 꽤 많은 사람들이 애정어린 코멘트를 남긴 것을 볼 때도 그렇다. 하지만 보통 일상에서는 서로 일기를 쓰는지 안쓰는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인지 혼자만 일기를 쓰고 있는 것 같아 동기가 약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반갑다. 이렇게 비공개 일기를 꾸준히 쓰는 사람들을 만나면 말이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계속 수집해볼까 싶다. 동료들을 모으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