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응어리를 쏟아내다

일기 하면 저는 가슴속에 뭔가 답답하게 뭉쳐있는 것, 즉 마음의 응어리를 속 시원하게 쏟아내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언제까지고 경청해 주는 친구

사실 마음이 힘들어질 때면 혼자만 끙끙대며 끌어안고 있기보단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이야기해 보면 막상 별것 아닌 것을 걱정을 했구나 할 때도 있고 때론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빨리 대처해야 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이것도 모두 일기 거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지인, 가족 또는 상담전문가라도 매시간 내게 붙어있으면서 계속해서 나의 이야기를 다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이 중 누구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절할까 고민이 될 때도 있고요. 누구와도 이야기하기 힘들다고 느껴지는 고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일기가 도움이 됩니다. 언제든, 얼마동안이든 실컷, 고민 없이 즉시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마치 말없이 내 이야기를 언제까지고 조용히 경청해 주는 속 깊은 친구를 만난 듯합니다. 물론 반응을 해준다거나 조언을 해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대신 그렇게 쏟아놓은 것을 다시 읽으며 엉킨 마음과 상황을 정리하며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면 이에 대해 말할 준비도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공감을 얻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때 일목요연하게 나의 상황을 전달하기도 수월해지는 것입니다.


유령과 괴물

뿐만 아니라 기억 속에서 유령처럼 형태 없이 존재하던 막연한 불안이나 걱정, 마음의 고통을 글로 쓰다 보면 그 정체가 좀 더 선명해집니다. 영화 속 유령도 정체가 탄로 나지 않는 초반이 제일 무섭고 실체가 드러나고 나면 공포는 시들해져 버리기 마련입니다. 정체탄로 자체로 문제가 해결되어 버릴 때도 있는 것입니다. 당장은 큰 일인 줄 알고 일기에 막 쓰다 보면 곧 별 것 아닌 지나친 걱정, 불안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도 하거든요.


물론 기록으로 곧바로 꺼내놓기 힘든 심각한 문제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유령인 줄 알고 덤볐는데 알고 보니 압도적인 괴물인 경우겠죠. 예를 들면 '트라우마를 일으켰다'라고 할만한 사건이라면 곧바로 이에 대해 쓰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잠시 일기 쓰기를 멈춥니다. 대신 최대한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쉬고, 잘 잔 다음 다시 펜과 키보드를 들고 덤빕니다. 일단 이 괴물의 실루엣이라도 기록으로 본떠두면 어떻게 대응할지, 공략할지를 좀 더 선명하게 고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당장은 못 이기더라도 말입니다. 혼자서 해결이 안 된다는 판단이 들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어떻게 말할지 등을 고민하기도 좋습니다.


흔히들 인생을 고해라고 한다. 삶의 바다 곳곳에 무수한 고통이 암초처럼 놓여 있는 탓이다.

이기주
<글의 품격>


이렇게 일기는 인생항해의 험로에서 생기는 수많은 마음속 응어리들을 품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암초들'을 헤쳐나간 보물 같은 경험들로 두툼해지는 항해일지는 앞으로 또 헤쳐나가야 할 위험 속에서 훌륭한 역사적 지혜의 보고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응어리가 깨운 일기인간

저의 첫 일기는 변화를 바라는 '반성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변화' 또한 일기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4개월 동안 바짝 매일 쓰고는 뚝 끊겨버렸습니다. 종이노트를 다 썼는데 다음 노트를 사서 기록할 때까지 일기 쓰기에 대한 의욕이 버티지 못하고 그만 소멸해 버렸습니다. 아마도 제가 해외로 유학을 가면서 그곳 생활에 적응하고 공부를 따라가는데 굉장히 정신이 없었던 듯합니다. 지금이라면 되려 그럴수록 더욱 일기를 썼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러다 그곳에서 몇 년 뒤 갑자기 들이닥친 거친 풍파는 제 인생이란 배를 뒤집어엎었고, 그제야 다시금 일기와 만나게 됩니다. 고통의 응어리가 맺히면서 제 속의 일기인간이 다시 깨어났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값 아래로

저희 집안의 경제력은 굴곡이 꽤 있는 편이었습니다. 흐릿한 어릴 적 기억으로는 그닥 넉넉치 않은 집이었습니다. 가게에 딸린 방한칸에 살았었으니까요. 그러다 20평 정도의 아파트로 이사한 뒤에는 형편이 확 좋아졌던 기억이 납니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동네에 4층 건물을 하나 올리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20살에는 당시에는 흔하다 할 수 없는 미국 유학도 갔습니다. 한마디로 생활의 기본값이 한껏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유학생활 4년차에 갑자기 그 기본값이 한없이 아래로 떨어져 ‘경제력 붕괴’를 경험합니다. 이와 함께 ‘심적 붕괴’도 일어납니다.


2004년의 금문교. 샌프란시스코는 연간 100일 이상 안개끼는 도시로 유명합니다. 제 삶도 거기서 안개속으로 더 빠져들어가버렸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드라마라면 너무 진부한 장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한 드라마속 한컷의 충격은 너무도 컷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값이 붕괴되는 경험은 커다란 심적 고통 또한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유학생활 동안 저는 나름 열심히 살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쉽게 얻지 못하는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며 생에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책임감 등이 이전과는 다른 수준으로 공부에 매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짧게 영어학원을 다닌 후 샌프란시스코의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2년 정도 공부했고 곧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2곳으로 편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가입학 승인 이메일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딱 그 때 였습니다. 마지막 학기의 중간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20살 때 3년은 지금보다 더 크게 다가오던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모든 걸 쏟아부어 올린 탑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버스정류장. STOP 표지판이 왠지 상징적입니다.

친구들, 교회사람들, 학교 교수님들께 경황없이 상황설명을 하고 작별인사를 하던 것, 그곳 학장님이 '군대 가느냐'라고 물어보던 것(예전에 그렇게 떠난 한국학생들이 있었나 봅니다), 숙소였던 학교 근처 단칸방을 떠나기 전 축 쳐진 얼굴로 영상일기를 캠코더(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입니다)로 찍어 남긴 것 등이 떠오릅니다. '황망하다'란 표현은 이 당시의 저를 너무도 정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당시에 그 소식과 함께 발병한 공황장애는 모든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20년 전 공황장애란 병명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체 무슨 문제인지, 어디서 도움 받아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저히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고서야 되찾은 것이 일기입니다. 마음의 응어리를 토하며 기도하고 그 내용을 일기에 썼습니다. 여전히 구체적인 문제해결방법은 나오지 않았지만 쓰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은 해소되었습니다. 멈춰야 하는 유학생활을 생각하면 비참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좋았던 일들, 감사할만한 일들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더 좋은 점은 이를 계기로 일기가 20년 이상 꾸준히 이어져 올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어지는 기록의 마음

그렇게 저는 중간에 애매하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사업부도와 심적부도란 짐을 지고 대학편입, 군입대, 연애와 결혼, 육아, 직장생활 등의 인생과업에 투입됩니다. 여기서는 짧게 언급하지만 에피소드가 많았습니다. 그 이후로 쌓인 일기가 4,000쪽(A4 기준)을 훌쩍 넘었으니까요.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그때보다 좋아졌습니다. 특히 공황장애는 상당히 호전되었습니다. 예전과 같은 수준의 고통은 거의 없습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들이 있지만 맞설 수 있는 의지력과 에너지가 있는 편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저의 이 두툼한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인생역사의 기록물일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문제해결노트의 역할도 해줬습니다. 


그 풀이과정이 곧 저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이전 02화 이 책에서 말하는 일기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