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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돌보다

일기는 스스로를 돌보기 좋은 기록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응어리 쏟기, 민낯으로 쉬기도 자기 돌봄의 일환입니다. 그리고 자기 돌봄에는 더 다양한 면이 있습니다. 


독립과 돌봄

성인이 되는 만 19세는 많은 이들에게 '독립'이란 단어가 특별해지는 시기입니다. 저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먼 타국 땅으로 떠났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이 시기는 부모의 돌봄에서 본격적으로 결별하는 시작점이기 때문에 '돌봄'과 '독립'이란 단어는 왠지 상극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도움 없이 뭐든 혼자서 척척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실은 그 둘 사이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독립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돌봄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돌봄에서 스스로 돌봄으로 전환하는 것이니까요. 


공황장애와 자기 돌봄

저 같은 경우엔 미국에서 공황장애를 겪고 한국으로 돌아와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기 돌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감했습니다. 


지금에야 돌이켜보면 뚜렷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들이 꽤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언어 등 문화 차이로 인한 사회적 관계가 갑자기 좁아진 것, 매우 짜고 달달한 음식과 잦은 패스트푸드 섭취 등이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생각 자체를 못했습니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건강에 좀 안 좋겠지'정도의 약한 경각심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신앙의 지식적인 면을 잘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대학식당에서 성경공부를 제안하는 사람들을 몇 개월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한인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영어로 성경을 배우며 영어공부도 하고 신앙공부도 추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6개월 정도가 지나자 기존 교회에서 나와야 한다며 저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반박도 해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결국 저는 매우 심각한 혼란과 불안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그들과 멀어졌지만 그 이후로도 혼란과 심적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해동안 여러 방면의 원인들이 축적되다가 사업부도 사건이 결정타처럼 터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로부터의 회복 또한 여러 면에서 여러 해동안 진행되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 면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인생

대학 때 배운 것 중 여전히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그림출처 : 펜메모덕후의 아날로그 집중력 도구


역사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단 하나의 원인만을 찾아내려는 것이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상황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일어난다.

J. Salevouris, Michael
, 역사학의 방법과 기술 : 실용지침서(The Methods and Skills of History: A Practical Guide)


개인의 역사적 사건들도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제가 겪은 공황장애는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문제(아버지 사업부도)로 인해서만 일어난 것 같지만 다른 원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4년 간 전혀 다른 미국사회(바깥띠) 속의 다른 문화(중간띠)에서 영적(교회문제), 교육적(높은 학업목표), 심리적(학업 스트레스 및 가시지 않는 불안감), 생물학적(식단악화), 사회적(문화차이로 인한 사회관계 저하) 등을 이미 겪고 있었습니다. 이미 댐의 이곳저곳에 균열이 있었고 물이 새고 있었는데 이를 붕괴시키는 마지막 충격을 준 사건이 사업부도(경제적 측면)인 것입니다.


붕괴로부터의 회복은 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버티기만 했습니다. 신앙은 당시 버팀목 중에 하나였고 이는 저의 큰 감사제목 중에 하나이지만, 버티기만 한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곧바로, 자동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가능한 대처를 조금씩 해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위와 같은 전체적인 그림이 없으니 시행착오 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삶의 제너럴리스트로

그렇게 18년이 지났고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을 재배치하는 작업들을 지금은 예전보다는 더 잘 해내고 있습니다. 삶의 면면에 생겼던 균열과 붕괴를 꽤 많이 재건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삶은 우리로 하여금 *제너럴리스트가 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너럴리스트 Generalist : 흔히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을 스페셜리스트 Specialist라고 하고 여러 영역에 박학다식하신 분들을 제너럴리스트 Generalist라고 합니다.


전인적 자기 돌봄

시간이 흐르며 반성일기로 시작한 저의 일기장은 점점 제너럴리스트의 일기로 바뀌어갔습니다. 거창한 변화도 아닙니다. 그저 시간순서대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쓰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것을 시간표식 일기(하편에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다룹니다)라고 부릅니다.


반성일기 같은 주제별 일기는 반성해야 할 만한 것이 포착되면 기록이 시작되는 반면 시간표식 일기는 수시로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차곡차곡 쌓는 것을 기본기로 합니다. 주제별 일기는 외날검처럼 그 주제의 방향으로는 강력하지만 칼등은 무딥니다. 다른 주제들은 애초에 포착이 잘 안 됩니다. 반면 시간표식 일기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주제를 가리지 않고 요약기록하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를 만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유난히 개운했다던지(생물학적 측면), 직장에서 프로젝트 또는 계약을 잘 마무리 지었다던지(직업적적, 경제적 측면),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 늦게까지 축하했다던지(심리사회적 측면) 등 일상의 여러 측면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 중 어떤 일들은 반복누적되어 이후에 양의 방향으로 또는 음의 방향으로 폭발하기도 합니다. 단순한 예로 좋은 습관의 누적은 성공을, 나쁜 습관의 누적은 실패를 불러오는 일들이 있습니다. 


주제별 일기와 시간표식 일기는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병행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보통은 일상을 차례로 기록하다가 최근 관심이 기우는 주제가 있으면 그것만을 위한 노트나 앱을 따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기를 쓰는 것은 *전인적 Holistic 자기 돌봄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기 쓰기로 전문가의 도움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면에서 내 삶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알아챌 가능성을 높일 수 있고 이에 어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지, 어떤 부분에서 도움을 요청할지, 어떻게 내 상황을 알릴지 등을 일기를 쓰며 나름 고민하고 정리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전인적 접근 Holistic Approach 은  의학, 심리학, 교육학 등 다양한 전문분야에서 취하는 접근입니다. 예로 심리상담이라고 해서 내담자의 심리적 측면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치료방법을 제안하는 방식입니다. 


퍼즐조각 마련해 두기

삶의 면면들을 일기로 남기는 것은 내 인생의 퍼즐조각을 만드는 것으로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전체 그림을 퍼즐로 맞춰본다면 언제나 빈 곳이 있기 마련입니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조각들이죠. 게다가 당장의 현안에 시선이 빼앗기면 있는 맞춰져 있는 조각들마저도 희미하게 보입니다. 다시 저의 예를 들자면 '공황장애를 처음 겪은 나'란 제목의 퍼즐그림은 배경이 심하게 흐림 처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사진에서 '심도조절'은 인물을 멋져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보통 어떤 대상에게 시선을 집중하면 자연스레 발생하는 일입니다. 심도조절된 사진들은 그것을 흉내 낸 것이죠. 그런데 고통의 상황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강렬한 고통일수록 시선을 다 끌어갑니다. 자신과 고통만 보이고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수많은 이전 장면들은 흐려지고 잊히는 것입니다. 


일상이 잔잔할 때 삶의 장면들을 꾸준히 기록해 두면 고통에 붙들린 시야를 해방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 장면 말고도 이전 장면들이 더 많이 있었다는 것을 좀 더 수월하게 의식할 수 있습니다. 영화 한 중간에 들어와서 잠깐 본 충격적인 장면만으로 그 영화를 판단하지 않게 해 줍니다. 전체 이야기를 보고 그 장면을 해석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쓰는 일기에는 미래의 내가 읽을 그 줄거리가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의 독립노트

저의 두 자녀에게 어떻게든 물려주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일기 쓰기입니다. 몇 년 뒤면 사춘기를 겪을 텐데 생각과 감정이 더욱 복잡하고 예민해지는 이 시기에 일기 쓰기의 이점을 경험해 보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산수는 암산으로 하지만 복잡한 수학은 기록으로 풀듯 마음이 엉키고 설킬 때 일기를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부모인 우리와 대화하는 것을 지향하겠지만 꺼내놓기 힘든 이야기들도 점점 늘어날 테니 기록과 함께 스스로 풀어나가는 방법도 천천히 배워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독립의 시기가 다가오면 더욱 요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생 일기를 쓸 생각입니다. 저에게도 여전히 독립은 진행 중이며 평생 마주해야 하는 과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태계적 관점처럼 우리 삶을 여러 영역으로 쪼갠 다음 영역별로 독립과 의존 정도를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중 어떤 면은 독립성이 높고 어떤 면은 의존성이 높을 때가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해서 돈을 잘 벌 때는 경제적 독립성이 높지만 대신 다른 영역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그 면에서는 의존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점점 해결하기 어려워질 테니 가족이나 지인, 전문가 등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아야 할 테니까요. 이렇게 보면 우리 개인의 면면들은 일평생 독립과 의존 그 사이 어딘가를 역동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강점이라고 부를만한 측면들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독립성이 높을 테고 약점이라고 부를 만한 측면들은 의존성이 높겠죠. 


독립과 자기 돌봄이 평생지속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일기는 10대와 20대뿐만 아니라 30대, 40대 또는 그 이상 어느 연령대에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빨리 시작할수록 더 좋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에겐 감정적 독립이 가장 어려운 게 아닌가 하는 것이 내가 지난해 불행을 겪고 난 뒤의 생각입니다.  

박완서
<박완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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