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으로 쉬다

블로그나 SNS에 쓰는 글은 '차려입은' 것들입니다. 신경을 많이 써야 하죠. 물론 그래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누구든 하루 종일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그리 차려입고 살 수는 없습니다. 나 편한 대로 입고 쉬는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기입니다. 꾸밈없는 민낯으로 마음껏 편히 쏟아놓을 수 있는 공간이죠.


즉, 일기는 '글을 쓴다'라는 느낌보다는 '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는다'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치유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일기는 인생만큼이나 다양해서 글쓰기에 가까운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 특히 일기의 글들을 나중에 세상에 내놓어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마치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고 차려입어보는 글쓰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공개, 비밀이 일기의 기본 특징인 만큼, 편하게 쓰는 것은 일기의 강력한 장점 중 하나입니다.


꾸밈없는 휴식

글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집을 나서면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마음마저도 꾸며줘야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직장 생활하시는 분들은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씩씩한 척', '적극적인 척', '친근한 척' 등 마음과 태도에 관련된 '척'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물론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럴 때도 있긴 한데 사람이 한결같이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속은 엉망이지만 함께 힘내서 성과를 내야 하는, 아니면 적어도 무사히 오늘 하루를 끝내야 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무실에서 분위기 쳐지는 표정을 하고 있기에는 눈치가 많이 보입니다. 집 나오면 본심은 대부분 가려져야 합니다. 억지로든, 자발적이든 말입니다.


문제는 어떤 이유든 간에 오래 쓰다 보면 답답하고 불편합니다. 집에 가서 얼른 집어던지고 편히 발 뻗고 퍼져서 쉬고 싶어 집니다. 내 방에 가서야 뱉었던 한숨을 몇 번이고 다시 삼키게 만들던 마스크를 확 벗어버리는 듯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기에 눌렸던 본심을 풀어놓을 때가 이와 비슷합니다.


솔직하게 써본 경험이 별로 없다면 처음에는 조금 어색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씩 일기에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쓰다 보면 일기는 점점 '진짜 나'와 만날 수 있는 비밀장소가 되어줍니다. 그렇게 일기의 방으로 들어가 민낯으로 편하게 쉬다 보면 어느 센가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가면을 벗은 민낯인 나를 좀 더 온전히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직면과 해결

솔직한 나와 만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해방과 휴식이지만 한편으로는 직면입니다. 그리고 직면은 항상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겹겹이 가려진 내면의 문제를 직시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민낯의 어딘가에는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마주하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하지만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받을 수 있다면 또 그만큼 가치 있는 것입니다. 직면은 때로 가면 아래 곪고 있는 상처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쓰는 가면 중에는 '상처받지 않은 척'이란 이름의 가면도 있습니다. 정글같이 험악한 경쟁이 있는 집단에서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가면은 거의 필수적입니다. 격렬한 경기 중인 종합격투기 선수를 보면 맞아서 고개가 돌아가고 피가 흘러도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합니다. 되려 아무렇지 않다며 양손을 들어 올려 어깨를 으쓱하고는 더 때려보라고 도발을 하기도 합니다. 상처로 약해진 모습을 내보이면 상대는 그대로 달려들 테니 조금이라도 회복할 때까지 철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주 두꺼운 가면을 쓰는 것이죠.


사기꾼들이 사람을 속이기 위해 쓰는 두껍고 화려한 가면과는 다릅니다. 경기를 보는 모두가 충분히 예상할만한 '사용이 합의된 가면'입니다. 배우가 연기할 때 쓰는 캐릭터란 가면과도 비슷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간 후에야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가면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게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 가면이 진짜 자신이라고 믿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조차 받을 않을 것입니다. 배우도 몰입했던 캐릭터를 드라마가 끝나면 놓아줍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너무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살면 어떻게 될까요? 나도 모르게 그 가면이 나라고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가면을 쓰다 보면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듯이 격투기 선수는 포커페이스란 가면을 통해 실제로 통증을 참는 인내력을 기르게 될 수 있습니다. 배우도 다양한 역을 연기하다 보면 가상인격의 장점들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마음에 들어 특정 캐릭터의 성격과 태도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단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가면과 민낯은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면이 나라고 믿어서 구분이 사라지면 가면 아래 민낯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럼 민낯은 방치되고 상처라도 나면 곪게 되는 것입니다. 혹여나 가면에 금이라도 가면 마치 내 얼굴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민낯에는 주름은 생길지언정 균열은 생길 수 없는데 말입니다.


자신의 페르소나(사회적 가면)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 위험한 점이다. 교수는 자신의 교과서와 자신을 동일시해 버리고 성악가는 목소리와 자신을 동일시해 버리는 것이다(1). (그 결과)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매우 순종적인 형태의 성격이 형성될 수 있다. '페르소나만 있는 존재' All Persona 로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과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2)

칼 구스타브 융,
출처 : 위키피디아
(1) C. G. Jung, Memories, Dreams, Reflections (London 1983) p. 416
(2) Anthony Stevens, On Jung (London 1990) p. 43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원래 가면 이상의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생스러우실 부모와 의사를 배려해 차분히 정돈된 가면을 쓰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엉엉 울고 소리치는 민낯으로 이 세상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일기라는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와 가면을 벗고 민낯을 살피는 시간을 통해 더욱 의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억눌렀던 본심과 상처를 일기에 드러내놓고 돌보며 우리는 민낯을 인식하고 또 가꿔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걸음씩 마음의 성숙이라는 쉽지 않은 과업을 평생토록 이뤄나가게 됩니다.


민낯 가르치기

일기 쓰기로 솔직하게 자신의 민낯을 알아가기로 결심했다면 상처뿐만 아니라 일그러진 민낯과 마주할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합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 내면의 세계는 분노와 증오로 불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못된 표정을 짓는 민낯을 직면할 뿐만 아니라 마치 선생처럼 스스로를 가르칠 준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훌륭하신 선생님들께서 학생에게 그러하듯, 양심적이고 화사한 민낯은 그것대로 칭찬하고 악당같이 못된 표정의 민낯은 그것대로 또 혼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좋은 선생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인생이란 학교에는 선생인척하는 사기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이가 허락 없이 교실에 들어와 가르치지 못하도록, 자신을 위한 '담임'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학교 등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경험은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학교 선생님뿐만 아니라 부모님, 지인, 멘토, 친구, 강사, 인플루언서, 책 그리고 심지어 경험까지도 인생의 선생님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선생님으로 모시지 않는 이들조차 영향을 끼칩니다. '나도 모르게 따라 하는' 나쁜 행동들이 그 예입니다. 탁월한 선생님들에게서 분별력을 배울 때 우리는 그런 알게 모르게 들어오는 나쁜 가르침들을 구별해 내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선생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기를 쓰는 시간이 특히 이 분별작업에 유용합니다. 오늘 내 인생학교의 교실에 드나든 이들의 말과 행동을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보며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흐릿한 기억 속에 뒤엉켜있는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구별해 보는 시간입니다. 홀로 판단하기 힘들다면 유보하고 이후 신뢰할만한 주위 사람이나 도서 전문가 또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추가적인 정보를 더 탐색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가짜정보, 편파정보가 넘치는 정보과잉시대에 더욱 필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일기습관은 이 작업을 태도로 정착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인생학교의 훌륭한 학생들은 자습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배움에 매진하는 이들은 어쩌면 열정적인 학생이면서도 스스로를 감독하는 선생마저 된 것입니다. 훌륭한 선생은 끊임없이 배우는 학생이기도 하듯 말입니다.


일기는 훌륭한 인생 자습이라 할 수 있다.

이태준
문장강화


*보안을 철저히!
마지막으로 이렇게 ‘진짜 나’와 만나는 비밀장소로 일기를 사용하려면 보안을 철저히 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집에서 편히 쉬려면 당연하게도 제일 먼저 대문의 잠금장치부터 철저히 해둬야 합니다. 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솔직하게 민낯을 드러내기 힘들어집니다. 종이노트를 쓰시는 분들 중에는 금고(!)를 마련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디지털 일기장을 쓰기 때문에 비밀번호를 개별 파일에 걸어서 보안조치를 합니다. 어떤 방법이든 자신만의 보안체계를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keyword
이전 03화응어리를 쏟아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