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독립을 준비하는 이들, 시작하는 이들, 이어나가는 이들 모두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독립은 결국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며 돌보는 일에는 기록이 요긴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운영에 역사책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 어떤 음식들을 먹었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데, 어떤 마음과 행동을 취했는지를 일기를 쓰며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건강한 몸과 마음, 그리고 인간관계를 위해 어떤 것은 유지할지, 버릴지, 아니면 더해나갈지를 좀 더 명학히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일기를 쓰는 순간에 한번 돌아보고 또 시간이 지나 언제든 다시 또 읽어볼 수 있습니다. 즉, 일기는 내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돌봄노트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는 만 19세는 많은 이들에게 '독립'이란 단어가 특별해지는 시기입니다. 저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먼 타국 땅으로 떠났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이 시기는 부모의 돌봄에서 본격적으로 결별하는 시작점이기 때문에 '돌봄'과 '독립'이란 단어는 왠지 상극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도움 없이 뭐든 혼자서 척척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실은 그 둘 사이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독립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돌봄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받는 것에서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니까요.
공황장애와 자기 돌봄
저의 경우 20년 전 미국유학생활 때 공황장애를 겪은 뒤 자기돌봄이란 개념이 각별해졌습니다.
당시 부모님의 회사 부도 소식을 접한 뒤 일주일쯤 지났을 때 공황발작을 처음으로 겪었습니다.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가정의 여유로운 금전적 상황이 뒤집어진 것, 학업을 중간에 관두고 4년 가까이 정착한 곳에서 황망히 떠나야 한다는 것 등은 공황을 불러올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후에야 공황장애의 원인이 비단 그것뿐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문화차이로 인해 사회적 관계가 급격히 제한된 것, 짜고 달달한 음식과 잦은 패스트푸드 섭취 등으로 인한 불편감은 계속 수면 아래에서 쌓이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다니던 한인교회 그리고 학교 식당에서 만난 미국교인들의 말이 고향의 기존 교회에서 들었던 것과 모두 각각 달라 혼란과 불안이 매우 커지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해동안 여러 방면의 원인들이 축적되다가 회사부도 사건이 결정타처럼 터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 또한 다 측면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같은 일을 겪더라도 왜 사람마다 대처, 회복양상이 다른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개인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단 하나의 원인만을 찾아내려는 것이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상황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일어난다.
J. Salevouris, Michael
, 역사학의 방법과 기술 : 실용지침서(The Methods and Skills of History: A Practical Guide)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사적 사건들도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가 겪은 공황장애는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문제(아버지 사업부도)로 인해서만 일어난 것 같지만 다른 원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4년 간 전혀 다른 미국사회(바깥띠) 속의 다른 문화(중간띠)에서 영적(교회문제), 교육적(원어민 수업 적응), 심리적(학업 스트레스 및 가시지 않는 불안감), 생물학적(식단악화), 사회적(문화차이로 인한 사회관계 저하) 등을 이미 겪고 있었습니다. 이미 댐의 이곳저곳에 균열이 있었고 물이 새고 있었는데 이를 붕괴시키는 마지막 충격을 준 사건이 사업부도(경제적 측면)인 것입니다.
붕괴로부터의 회복은 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버티기만 했습니다. 신앙은 당시 버팀목 중에 하나였고 이는 저의 큰 감사제목 중에 하나이지만, 버티기만 한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곧바로, 자동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가능한 대처를 조금씩 해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위와 같은 전체적인 그림이 없으니 시행착오 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사건 후 18년 이상 지나며 제 삶은 여러 측면에서 다행히 회복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삶은 우리로 하여금 *제너럴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너럴리스트 Generalist : 흔히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을 스페셜리스트 Specialist라고 하고 여러 영역에 박학다식하신 분들을 제너럴리스트 Generalist라고 합니다.
일기로 전인적 자기 돌봄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반성으로 시작한 저의 일기장은 점점 제너럴리스트의 일기로 바뀌어갔습니다. 거창한 변화도 아닙니다. 그저 시간순서대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쓰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것을 시간표식 일기(하편에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다룹니다)라고 부릅니다.
반성일기 같은 주제별 일기는 반성해야 할 만한 것이 포착되면 기록이 시작되는 반면 시간표식 일기는 수시로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차곡차곡 쌓는 것을 기본기로 합니다. 주제별 일기는 외날검처럼 그 주제의 방향으로는 강력하지만 다른 방향의 칼등은 무딥니다. 반성일기를 예로 들자면, 감사할만한 일들은 제대로, 깊이 포착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요. 반면 시간표식 일기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주제를 가리지 않고 요약기록하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를 만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주제별 일기와 시간표식 일기는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병행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보통은 일상을 차례로 기록하다가 최근 관심이 기우는 주제가 있으면 그것만을 위한 노트나 앱을 따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기를 쓰는 것은 *전인적 Holistic 자기 돌봄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기 쓰기로 전문가의 도움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면에서 내 삶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알아챌 가능성을 높일 수 있고 이에 어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지, 어떤 부분에서 도움을 요청할지, 어떻게 내 상황을 알릴지 등을 일기를 쓰며 나름 고민하고 정리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전인적 접근 Holistic Approach 은 의학, 심리학, 교육학 등 다양한 전문분야에서 취하는 접근입니다. 예로 심리상담이라고 해서 내담자의 심리적 측면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치료방법을 제안하는 방식입니다.
저의 두 자녀에게 어떻게든 물려주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일기 쓰기입니다. 몇 년 뒤면 사춘기를 겪을 텐데 생각과 감정이 더욱 복잡하고 예민해지는 이 시기에 일기 쓰기의 이점을 경험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산수는 암산으로 하지만 복잡한 수학은 기록으로 풀듯 마음의 복잡한 문제를 위해서는 일기라는 기록공간을 건네주고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부모인 우리와 대화하는 것을 지향하겠지만 꺼내놓기 힘든 이야기들은 일기에 쓰며 점점 독립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평생 일기를 쓸 생각입니다. 저에게도 여전히 독립은 진행 중이며 평생 마주해야 하는 과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측면을 가진 우리네 삶은 영역별로 독립과 의존의 정도가 역동적으로 변합니다. 일을 많이 해서 돈을 잘 벌 때는 경제적 독립성이 높지만 신경쓰지 못한 다른 영역에 소홀해져서 의존성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또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독립과 자기 돌봄은 평생지속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삶 전반을 돌보는 기록으로서의 일기는 10대와 20대뿐만 아니라 30대, 40대 또는 그 이상 어느 연령대에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빨리 시작할수록 더 좋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에겐 감정적 독립이 가장 어려운 게 아닌가 하는 것이 내가 지난해 불행을 겪고 난 뒤의 생각입니다.
박완서
<박완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