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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으로 쉬다

그런 건 일기장에나 써라

일기는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이 편히 쓸 수 있는 기록입니다. 혼자 사는 집에서는 편안한 차림과 민낯으로 마음껏 쉴 수 있듯 말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약속이 잡혀서 외출을 해야 하면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샤워하고 옷을 고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 앞에 서서 발표를 하는 등 내가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나름 깔끔하지 않냐며 잠옷을 다려 입고 나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랬다간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는 충격적인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글로 치자면 종종 인터넷 댓글에서 마주치는 '그런 건 일기장에나 써라'는 핀잔에 해당하겠습니다. 


괜히 일기장이 찬밥신세처럼 느껴져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말 입니다만, 읽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엉망으로 써버린 글을 막상 대하면 자연스레 일기장으로, 집으로 돌아가란 말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비꼬는 듯한 말이지만 저는 그 말 그대로 하는 것이 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평소에 꾸준히 그렇게 하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선의 압박이 없는 일기는 솔직하고 편안하게 본심을 드러내고 또 가꿀 수 있는 기록입니다.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 그리고 나아가 민낯과 맨몸까지 세세히 살피고 돌볼 수 있는 '자기만의 방'같은 공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생활 공간은 독립된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기도 그러한 '기록의 사생활 공간'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본심을 만나다

밖에 나가면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마음마저도 꾸며줘야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직장 생활하시는 분들은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씩씩한 척', '적극적인 척', '친근한 척' 등 마음과 태도에 관련된 '척'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물론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럴 때도 있긴 한데 사람이 한결같이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속은 엉망이지만 함께 힘내서 성과를 내야 하는, 아니면 적어도 무사히 오늘 하루를 끝내야 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무실에서 분위기 쳐지는 표정을 하고 있기에는 눈치가 많이 보입니다. 집 나오면 본심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마음에도 옷을 입혀야 하고 민낯은 가면으로 가리는 것입니다. 상황상 억지로 써야 할 때도 있고 또 마음에 들어서 자발적으로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문제는 어떤 이유든 간에 오래 쓰다 보면 답답하고 불편합니다. 집에 가서 얼른 집어던지고 편히 발 뻗고 퍼져서 쉬고 싶어 집니다. 이때 가면을 쓰며 가렸던 본심, 상황상 눌러뒀던 솔직한 감정과 의견을 편하게 다 쓸 수 있는 곳이 일기입니다. 뱉었던 한숨을 몇 번이고 다시 삼키게 만들던 마스크를 확 벗어버리는 듯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써본 경험이 별로 없다면 처음에는 조금 어색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씩 일기에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쓰다 보면 일기는 점점 '진짜 나'와 만날 수 있는 비밀장소가 되어줍니다. 그렇게 일기의 방으로 들어가 민낯으로 편하게 쉬다 보면 어느 센가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가면을 벗은 민낯인 나를 좀 더 온전히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면과 민낯

민낯을 정기적으로 만나다 보면 또 다른 이점이 있습니다. 가면 아래 곪고 있는 상처를 제 때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쓰는 가면 중에는 '상처받지 않은 척'이란 이름의 가면도 있습니다. 정글같이 험악한 경쟁이 있는 집단에서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가면은 거의 필수적입니다. 격렬한 경기 중인 종합격투기 선수를 보면 맞아서 고개가 돌아가고 피가 흘러도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합니다. 되려 아무렇지 않다며 양손을 들어 올려 어깨를 으쓱하고는 더 때려보라고 도발을 하기도 합니다. 상처로 약해진 모습을 내보이면 상대는 그대로 달려들 테니 조금이라도 회복할 때까지 철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주 두꺼운 가면을 쓰는 것이죠. 


사기꾼들이 사람을 속이기 위해 쓰는 두껍고 화려한 가면과는 다릅니다. 경기를 보는 모두가 충분히 예상할만한 '사용이 합의된 가면'입니다. 배우가 연기할 때 쓰는 캐릭터란 가면과도 비슷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간 후에야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가면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게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 가면이 진짜 자신이라고 믿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조차 받을 않을 것입니다. 배우도 몰입했던 캐릭터를 드라마가 끝나면 놓아줍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너무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살면 어떻게 될까요? 나도 모르게 그 가면이 나라고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가면을 쓰다 보면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듯이 격투기 선수는 포커페이스란 가면을 통해 실제로 통증을 참는 인내력을 기르게 될 수 있습니다. 배우도 다양한 역을 연기하다 보면 가상인격의 장점들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마음에 들어 특정 캐릭터의 성격과 태도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단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가면과 민낯은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면이 나라고 믿어서 구분이 사라지면 가면 아래 민낯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럼 민낯은 방치되고 상처라도 나면 곪게 되는 것입니다. 혹여나 가면에 금이라도 가면 마치 내 얼굴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민낯에는 주름은 생길지언정 균열은 생길 수 없는데 말입니다. 


자신의 페르소나(사회적 가면)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 위험한 점이다. 교수는 자신의 교과서와 자신을 동일시해 버리고 성악가는 목소리와 자신을 동일시해 버리는 것이다(1). (그 결과)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매우 순종적인 형태의 성격이 형성될 수 있다. '페르소나만 있는 존재' All Persona 로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과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2)

칼 구스타브 융,
출처 : 위키피디아
(1) C. G. Jung, Memories, Dreams, Reflections (London 1983) p. 416
(2) Anthony Stevens, On Jung (London 1990) p. 43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원래 가면 이상의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생스러우실 부모와 의사를 배려해 차분히 정돈된 가면을 쓰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엉엉 울고 소리치는 민낯으로 이 세상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일기라는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와 가면을 벗고 민낯을 살피는 시간을 통해 더욱 의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억눌렀던 본심과 상처를 일기에 드러내놓고 돌보며 우리는 민낯을 인식하고 또 가꿔나갈 수 있습니다. 


민낯 가르치기

일기 쓰기로 솔직하게 자신의 민낯을 알아가기로 결심했다면 상처뿐만 아니라 일그러진 민낯과 마주할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합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 내면의 세계는 분노와 증오로 불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못되고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민낯을 직면할 뿐만 아니라 마치 선생처럼 스스로를 가르칠 준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훌륭하신 선생님들께서 학생에게 그러하듯, 양심적이고 화사한 민낯은 그것대로 칭찬하고 악당같이 못된 표정의 민낯은 그것대로 또 혼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낯에는 다양한 면과 층이 있기에 양심의 민낯 또는 악당스런 민낯 둘 중 하나만 콕 집어 '그것이 곧 나다'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변화의 가능성 또한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렇게 일기를 통해 나의 민낯을 성찰하며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칭찬과 훈계를 하는 것은 마치 나 자신에게 좋은 선생이 되어주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특히 우리 인생이란 학교에는 좋은 선생님뿐만 아니라 나쁜 선생도 있고 선생 인척하는 사기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선생이 되어 자신을 지키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외부강사가 허락 없이 교실에 들어와 자기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담임 선생님처럼 말입니다. 


이럴 때 인생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경험은 큰 도움이 됩니다. 꼭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 부모님, 지인, 멘토, 친구, 강사, 인플루언서, 책 그리고 심지어 경험까지도 인생의 선생님이 될 수 있습니다. 탁월한 선생님들은 지식정리도 잘하시지만 가르치는 방식과 태도도 훌륭하기 때문에 우리는 학생으로서 배울 뿐만 아니라 선생으로서의 태도와 방식도 알게 모르게 흡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기를 쓰며 오늘 내 인생학교의 교실에 드나든 이들의 말과 행동을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보며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는 시간입니다. 홀로 판단하기 힘들다면 신뢰할만한 주위 사람이나 전문가 또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추가적인 정보를 더 탐색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가짜정보, 편파정보가 넘치는 정보과잉시대에 필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일기습관은 이런 태도를 기르는데도 유용합니다. 


인생학교의 훌륭한 학생들은 자습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배움에 매진하는 이들은 어쩌면 열정적인 학생이면서도 스스로를 감독하는 선생마저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훌륭한 선생이 끊임없이 배우는 학생이기도 하듯 말입니다. 


일기는 훌륭한 인생 자습이라 할 수 있다.

이태준
문장강화


*보안을 철저히!
마지막으로 이렇게 ‘진짜 나’와 만나는 비밀장소로 일기를 사용하려면 보안을 철저히 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집에서 편히 쉬려면 당연하게도 제일 먼저 대문의 잠금장치부터 철저히 해둬야 합니다. 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솔직하게 민낯을 드러내기 힘들어집니다. 종이노트를 쓰시는 분들 중에는 금고(!)를 마련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디지털 일기장을 쓰기 때문에 비밀번호를 개별 파일에 걸어서 보안조치를 합니다. 어떤 방법이든 자신만의 보안체계를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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