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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능력도 얻다

일기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일기를 시작하는 이유가 다들 가지각색입니다.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서,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불안을 해결하고 싶어서, 슬픔을 털어놓고 싶어서, 즐거운 추억을 돌아보기 위해서 등 이유가 다양합니다. 그래서 일기에서 얻는 것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일기를 시작하게 되었든 공통적으로 얻는 것들도 있습니다. '덤으로' 얻는 것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 능력

제가 덤으로 얻은 첫 번째 능력은 당연하게도 글쓰기 능력입니다. 일기쓰기는 이미 훌륭한 글쓰기 훈련 중 하나로 유명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경험을 문장으로 빗어내는 일이 일기이다 보니 안 그러려고 해도 글쓰기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일기에 응어리를 쏟아놓는 중에 자연스레 생각, 감정, 행동 그리고 상황을 글로 표현하는 훈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기를 오래 쓰다 보니 글 쓰라고 하면 몇 글자도 못쓰고 일단 머리부터 아파오던 시절과는 완전 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뭔가 쓰라고 하면 너무 장황하게 많이 쓰게 되어서 잔가지를 쳐내는 것이 더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변화는 탁월한 문장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상을 담는 일기는 말과 행동을 묘사해야 할 때가 잦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 장르에서 이런 식의 묘사를 자주 만날 수 있는데 때로 '정말 이런 표현을 어떻게 생각해 내셨을까?' 할 정도로 감탄할 때가 예전보다 더 잦아졌습니다. 동네축구라도 축구를 자주 하는 사람이 프로선수들의 실력을 잘 알아보듯 일기라도 자주 쓰다 보니 저도 실눈 정도는 뜬 게 아닌가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좀 더 잘 써보고 싶다'는 열망도 점점 커졌습니다. 일기 쓰는데 자꾸 같은 표현만 쓰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했던 마음들이 거름처럼 차곡차곡 쌓여 그런 의욕의 싹을 틔워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 능력

두 번째는 이야기 능력입니다. 경험을 글로 옮길 때 우리는 이야기를 씁니다. 이야기는 주제, 등장인물, 시간과 장소, 대사와 행동, 사건발생과 결말 따위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죠. 특히 내가 직접 경험한 사건을 일기에 쓰는 경우는 다른 누군가의 편집이 가해지지 않은, 원본실화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속마음까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실화로서 사실 일기가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듣고 읽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신속한 상황파악

일기는 이런 날것의 실화가 가지고 있는 특징에 익숙해지게 해 줍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접하면 줄거리가 쉽게 예상이 되듯이 현실의 이야기들이 주로 어떻게 전개되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더 잘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겪은 이야기를 이해해서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하거나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줄 때 신속하게 상황 파악을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독특한 이야기에 대한 예민성

그리고 일기를 쓰다 보면 인생 이야기의 세부사항들이 축적됩니다. 세세할수록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독특한 삶의 경로를 더욱 의식하게 됩니다. 동시에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경로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자연스레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누구 하나 완전히 동일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으면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의 속사정을 성급하게 지레짐작하는 실수를 피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내가 당사자인 갈등상황에선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한다'는 상식은 사실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이렇게 훈련되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줌인과 줌아웃하는 능력

오래 기간 축적된 일기는 나무와 숲 모두를 보도록 도와줍니다. 전체 줄거리와 그것을 이루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일기 속에 담깁니다. 필요할 때는 에피소드를 세세하게 살피는 줌인을 할 수 있고 또 큼직한 사건 위주로 전체 줄거리를 보기 위해 줌 아웃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 이야기의 부분과 전체를 연결짓기 쉬워집니다. 


역사가처럼 사고하는 능력

세 번째는 역사학자들이 *역사학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르는 능력입니다. 역사적 사건들은 한 가지 원인이 아닌 여러 원인으로 발생한다는 것, 사건이 일어난 당시대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것, 현재 우리는 많은 맥락이 바뀐 상황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는 것 등입니다. 


*역사학적 사고방식 Historical Thinking : 대표적인 것으로 '복잡한 인과에 대한 예민성', '사건의 맥락에 대한 예민성' 그리고 '시간 흐름에 따른 변화에 대한 예민성' 등이 있습니다.


수백년 전과 비교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본질적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기 합니다. 저희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난 이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제가 공황장애를 겪은 이유도 그 사건 하나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원인을 고민할 수 있는 판단력과 정보력이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기를 쓰는 것은 나의 역사를 기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이다보니 이런 사고방식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역사책은 마치 우리사회가 쓰는 일기장과도 같습니다. 물론 여러 역사가들의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를 거친 일기장이지만요. 


많은 역사학자들은 '역사학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르는 이런 마음가짐을 개발하는 것이 단순한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Michael J. Salevouris, Conal Furay
<역사학의 연구방법과 기술 : 실용적 지침 4판>


태생적 역사가 Born-Historian 와 미스토리언 Mistorian

돌이켜보면 사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역사가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첫 걸음마를 하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데 기본적으로 과거로 부터 배우는 일입니다. 단지 종이가 아닌 기억에 새겨넣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 어린이 집에 가게 되면 종이에 연필로 기록하는 걸 배우기 시작합니다. 기록의 힘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누군가는 공부 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한 기록인 일기를 쓰기도 합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인생역사를 구전역사에서 구문역사로 전환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만 활용하는 태생적 역사가에서 기록도 활용하는 의도적인 역사가로 한발 내디딘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 역사가가 된 사람을 미스토리언 Mistorian 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My Life's + Historian = Mistorian


어떤 능력이든지

위 능력들은 말하자면 일기의 직접적인 혜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일기를 계속 쓰다보면 자연스레 덤으로도 얻을 수 있는 능력들입니다. 당연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일기를 쓴다면 그 효과가 더 커지겠죠. 


하지만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 처럼 일기는 어떤 능력이든지 향상할 수 있습니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예로 다이어트를 잘하고 싶다면 다이어트 일기를 쓰면 됩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성공하는데 더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다이어트 전문지식입니다. 일기는 배운 다이어트 방법을 잘 실천하는지 스스로 관찰하고 살피는데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다이어트를 돕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기의 쓸모를 계속해서 확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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